옛 전남도청 앞 노제…5·18민주묘지 영면

‘영원한 내 사랑. 참 수행자.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성자입니다.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하관을 위해 관를 덮고 있던 흰색 태극기를 걷어내자 관 뚜껑 위에 검은색 유성매직으로 직접 쓴 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인 전소현씨가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가슴으로 쓴 ‘마지막 편지’였다. 시민들의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다.

▲ 의행 법사 영결식. ⓒ광주인
▲ 고인의 유족 전소연씨가 쓴 마지막 편지. ⓒ광주인

장례식 날씨는 고인의 성정을 상징한다던가.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를 보인 19일,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함께 한 ‘시민상주’이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와 평화, 인권을 염원한 ‘평화운동가’ 고 정의행 의장의 민주시민장이 엄수됐다.

이날 오전 10시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에서 노제를 지내고 11시30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유족과 배종렬·노영숙·이범식 상임장례위원장, 김희용 집행위원장, 선·후배, 시민사회단체, 불교계,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시민상주모임 회원 등 200여명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 우재군 아버지 고영환씨, 세호 군 아버지 제삼열씨도 안산에서 찾아왔다.

이범식 상임장례위원장은 노제 인사말에서 “의행 법사는 현장노동자로서 80년 5월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시대적 양심과 실천적 삶을 살아왔다”며 “온갖 고난과 질곡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양심으로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평화운동가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는 세월호 진실을 규명하고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 진정 이땅이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희망하는 자리”라며 “평생 의연하게 살아온 의행 법사의 삶과 정신을 우리들 각자 마슴속에 아로새기면서 살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 법선 스님 추도사. ⓒ광주인
▲ 의행 법사의 큰아들 자주씨가 유족 인사를 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광주인

문빈정사 주지 법선스님은 조사에서 “나를 버림으로서 참으로 세상과 함께 하고픈 당신이었기에, 항상 우리를 부끄럽게 하셨다”며 “당신은 살아있는 순간에는 온전히 살아있었고 지금 이순간도 온전히 깨어계신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법사님 당신은 또 지옥으로 가실 것이다. 당신 성정상 지옥이 텅 비어서 모든 중생이 평안해질 때까지 당신은 지옥을 마다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그 누가 중생을 위한 끝없는 연민을 가진 당신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만 이번만은 제발 저희 바람대로 편안한 그 자리에 머무르시기를 중생의 마음으로 부탁드린다”고 추모했다.

의행 법사의 큰아들 자주씨는 “아버지께서 항상 화합과 섬김, 나누는 생활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겸손하게 살라고 가르치셨다”며 “아버님은 평생 행동으로 보여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새삼 깨달았다”며 “저희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섬기며 나누며 겸손하게, 정의를 끝까지 가슴에 새기며 살겠다”고 말했다.

김은숙씨의 추도곡 ‘꽃을 바치나이다’와 박강의·김호씨의 진혼무가 이어졌다. 박씨는 맨발로 바라춤을 췄고 김씨는 ‘의행 법사’를 의미하는 탈을 쓰고 남은 이들을 한 번씩 바라본 후 무대 뒤로 사라졌다. 진혼무를 바친 박씨와 김씨는 무대 뒤에서 한참을 통곡했다.

노제 사회를 보던 김희용 집행위원장은 진혼무가 이어지는 동안 분향소 칸막이 뒤에서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불교와 개신교, 종교는 다르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벗이었던 그는 혼자서 숨죽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박강의씨 진혼무. ⓒ광주인
▲ 고 정의행 법사로 분한 김호씨가 탈을 쓰고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 ⓒ광주인
▲ 의행 법사의 오랜 벗 김희용 목사가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 ⓒ광주인

노제를 끝낸 운구행렬은 광주 북구 운정동에 있는 국립5·18민주묘지로 향했다. 흰색 태극기로 덮은 의행 법사의 운구가 영결식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200여명의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오월어머니집 노영숙 관장은 “제가 기억하는 의행 법사는 한 가운데 있기 보다는 주변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보석같은 존재였다”며 “이제 그런 그가 제 곁에, 우리 어머니들 곁에 그리고 여러분들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40년지기 친구 이한수씨는 영결식에서 스무 살 시절 고인이 남겨줬다는 조그만 쪽지 글을 소개하며 울먹였다.

“의행 법사는 제게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제자였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스무살 때 의행 법사가 제게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제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과 더불어 아파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과 더불어 기뻐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과 더불어 평안합니다.’

이씨는 “저는 그 글을 평생 가보로 간직하고 지금도 핸폰에 넣어 간직한다”며 “제 삶을 지켜줬고 의행 법사도 그 정신을 갖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고 의행 법사의 오랜 벗 이한수씨. ⓒ광주인
▲ 고 의행 법사의 부인 전소연씨가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세월호 기억팔찌를 빼 건네고 있다. ⓒ광주인
▲ 고 의행 법사의 관 위에 놓인 세월호 기억팔찌와 배지, 시집. ⓒ광주인

의행 법사의 운구는 5·18민주묘지 10-16번 묘지 앞에 멈춰섰다. 이승의 마지막 순간인 하관식이지만 유족들은 오열하지 않았다. 부인 전씨는 하관식 내내 ‘나무아미타불’을 거듭 되내며 속으로 슬픔을 달랬다.

하관식이 끝날 무렵 부인은 팔목에 차고 있던 세월호 기억팔찌와 왼쪽 가슴에 달고 있던 리본 배지를 빼 관 위에 놓았다. 고인이 쓴 시집 ‘노란리본’과 ‘불설아미타경’도 함께 놓였다. 그 위로 양지바른 땅에서 퍼온 황토가 곱게 뿌려졌다.

‘여보. 사랑했어요 죽으면서도 내 무릎을 주물러 주셨던 그 따뜻한 마음 기억하며 살게요. 극락왕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광주시민상주모임 윤인화씨는 “큰 어른의 큰 아내다운 기품을 지니셨다”며 “의연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며 새삼 의행 법사님은 행복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인의 49재 추모법회는 광주 동구 운림동 문빈정사에서 22일 오후 2시(초재)에, 막재는 4월4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 눈물. ⓒ광주인
▲ 고 정의행 법사 노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있다. ⓒ광주인
▲ 고인의 부인 전소연씨가 흐느끼고 있다. ⓒ광주인
▲ 의행 법사의 운구행렬이 국립 5.18민주묘지로 이동하고 있다. ⓒ광주인
▲ 헌화. ⓒ광주인
▲ 헌화. ⓒ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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