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본령이었던 길이 제 소임을 마치고 생명을 다했다.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인 탄생과 죽음의 굴레에서 길도 그 예외가 아니었던 것. 

그러나 도도히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계에서 시작과 끝은 둘이 아니듯 끝이 곧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푸른 길’은 철길이 죽어 부활한 사람을 위한 새 길이다.

▲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정미연 명예기자 제공

사라진 길이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지난 2000년 경전선, 광주역~효천역 간 11km의 기찻길이 소음과 사고를 유발한다는 민원에 못 이겨 결국 폐선을 결정하게 되면서 기차와 사람, 그리고 사람과 공간을 이어주던 길이 잠시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자취를 감춘 철길은 ‘푸른 길’이란 새 이름을 달고 새롭게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새 길엔 과거의 흔적이 남았다.

푸른 길의 시작점인 옛 남광주역과 그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 짧게 남겨진 철로가 있고 그 위에 두 대의 객차가 초록색 옷을 입고 우리를 맞는다. 

기차 안에는 승객 대신 책을 가득 싣고서 ‘푸른길기차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꿔 독자를 반긴다.

플랫폼에 서서 광주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직 남겨놓은 옛 철교가 눈길을 잡아끈다.

철교 위로 새로 지어진 날렵하고 세련된 보행자 다리 때문에 낡고 부식이 심한 옛 철교는 초라해 보일 법도 하건만 오래된 것의 힘과 무게는 오히려 새것을 압도한다.

마치 그 옛날 기차가 힘차게 지나다니던 시절이 상상돼 감회가 새롭다.

옛철교는 한편으로 오래 전부터 새들의 쉼터가 되었던 듯,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끼리끼리 어우러진 다정한 모습이 비둘기의 상징처럼 평화롭다.

쉴 새 없이 차들이 오가는 도심 한 복판에서 평화로운 광경을 만나니 더 반갑다.

▲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정미연 명예기자 제공

 

▲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제공

남광주역은 사라졌어도 그 역세권이랄 수 있는 남광주 시장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남광주 시장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기차가 다니던 시절, 벌교 보성 등지의 해산물이 기차에 실려 왔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네 엄마들은 참꼬막, 새꼬막 등 해산물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도회지에 내다 팔기 위해 기차에 올라 그 기차에서 내린 곳이 남광주역이었다.

그러니까 남광주 시장은 순전히 기차 때문에 유명해진 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광주 시장은 광주 시내 많은 시장 가운데서도 해산물이 싱싱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지금은 기차 대신 트럭에 실려 오지만, 아직도 그 명성과 활기는 그대로다.

▲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정미연 명예기자 제공

시장을 나와 광주역 쪽으로 난 푸른 길을 향해 걷는다. 여기서부터 길의 끝인 광주역까지는 약 4킬로미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족할 거리다.

아직 남도의 초겨울은 가을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다. 지금쯤 북쪽 백두대간 심산유곡의 나무들은 삭풍에 떨고 있겠지만 이곳의 나무들은 아직 가을의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색색이 고운 자태를 뽐내는 가을 나무들이 떨어 낸 이파리가 색종이처럼 휘날린다. 푸른 길의 초입은 조붓한 오솔길이다.

시간의 흐름은 끊임없이 망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인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 정겨운 풍경이다.

조선대학교 앞, 건널목을 지나자 비로소 옛 철길의 곡선이 드러난다. 유유히 반원을 그리며 돌아갔을 기차를 상상하니 소설 ‘사평역’ 속의 문장 한 구절이 떠오른다.

“봄날 몸을 푼 강물이 흐르듯 반원을 그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철길의 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모든 걸 다 마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노년의 모습처럼, 그것은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곤 하는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철길을 죽음에 비유한 소설가의 문학적 감수성이 예전엔 낯설었다. 죽음의 고통을 평온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하지만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며 떠올린 이 구절은 손뼉을 맞대듯 공감의 느낌을 준다. 하긴 발밑에 밟히는 무수한 낙엽들도 실은 잎이 죽어 떨어진 것들이다.

그럼에도 걷는 이 누구도 슬퍼하거나 울지 않는다. 발밑의 보드라운 촉감을 통해 오히려 평온한 마음을 얻는다. 

봄기운을 받아 연둣빛 새싹을 틔우고 한여름 햇볕을 먹고 튼실한 열매를 키우고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에 아름답게 물들어 고운 자태를 뽐냈다면 이제 제 역할을 다 마친 것 아닐까?

생명의 순환계는 죽은 이파리들을 양분삼아 내년에 다시 새싹을 틔워낼 것이다.

자연과 우주의 섭리는 빙빙 돌리듯 생명을 순환시킨다. 여기서 슬픔은 무의미하다.

건널목의 흔적이 남은 도로를 넘고, 다시 나무의 길로 들어서기를 반복하며 놀며 쉬며 걷는 푸른 길은 마치 먼 여행이라도 온 양 가슴을 통과하는 기쁨을 준다.

농장다리를 지나 산수동 굴다리에 접어드니 기적을 울리며 달렸을 구부러진 길에 아담한 벤치를 놓고, 광장을 만들어 그 벤치들이 기차처럼 이어져 있는 정겨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과거 기찻길 옆 옹색한 오막살이들도 이제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공원을 정원으로 삼은 집들이 되어있다.

▲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정미연 명예기자 제공

달동네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비좁은 골목길도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혔다. 대신 오밀조밀 무명작가의 작품으로 단장된 골목길은 그래피티로 모던하게 단장해 멋진 예술공간으로 변모했다.

광주역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기니 기차가 다녔다는 흔적으로 공원길 몇 군데에 남겨둔 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길은 기차가 다니던 옛날의 향수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푸른 길은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고 있다. 걷는 사람의 무리가 늘어나자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들만한 행사나 이벤트가 자주 열린다. 주말 나눔 시장이 열리고, 물물교환 형태의 농산물 거래장이 두어 시간 반짝 열렸다 닫힌다.

덕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깔끔한 찻집들이 생겨나 새로운 활기가 솟아나고 있다.

맛있는 사탕을 빨듯 아끼며 걸어온 길이지만 금세 종착지에 다다른다. 길은 광주역 부근에서 아쉽게도 끝을 맺는다.

폐선부지 기차 길에 꽃과 나무를 심어 초록의 길, 생명의 길을 만든 지 벌써 십여 년, 칙칙폭폭 기적을 울리며 도심을 가로 지르던 애환의 기찻길이 이제 광주를 대표하는 녹지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기차가 사라진 자리 푸른 길은 이렇게 다시 부활했다.

가시고기가 죽은 뒤 새끼들의 밥이 되어 생명의 순환과정에 동참하듯 예전의 기찻길은 푸른 길로 다시 태어나 오늘도 초록의 기적소리를 도시 곳곳으로 퍼 나른다.

/사진: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 정미연 명예기자 
 

올해 4월 호남고속철도개통으로 서울~광주간 거리가 축지법을 쓴 듯 가까워졌다. 용산역에서 KTX 를 타고 1시간 40분 남짓이면 광주송정역에 도착할 수 있다. 광주송정역에 내려 대합실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밖으로 나가면 광주도시철도 광주송정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기다린다.

광주송정역 지하철역에서 푸른 길의 시작점인 남광주시장역까지 10분 간격으로 지하철이 운행되며 소요시간은 25분 남짓이다.


** 손민두 코레일 KTX기장은 광주 출신으로 1985년에 철도청에 들어가 2004년 4월1일 경부고속철도 개통 첫 KTX를 운행하고 무사고 2백만 킬로미터를 달성한 베테랑 기장이다. 틈틈이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기자로 활동하면서 KTX객실 기내지 <KTX매거진>에 기차와 인문학이 만나는 칼럼 '기차이야기'를 3년간 연재하며 기차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광주in>은 손 기장이 그동안 잡지와 사보에 연재했던 글과 새 글을 부정기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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