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만드는 ‘사람사는 세상’
자기검열에서 탈출하자

도둑도 도둑놈이라고 부르면 싫어한다. 소변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린놈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싸개’다. ‘오줌싸개’라는 말이다. 요즘 ‘기레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직업군’이 있다. ‘기러기’의 오타가 아니다. 모를까 풀이하면 ‘기자쓰레기’의 줄임 말이다. 무관의 제왕이며 사회정의 구현의 상징인 기자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언론인들이 존경하는 송건호 선생님은 내 고등학교 은사다. 아직도 쟁쟁하게 귀를 울리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아무리 나라가 부패해도 언론이 살아 있으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독재의 고문 후유증으로 불치병을 얻으셨다. 고등학교 때 제자인 내게 ‘누구시죠’ 묻는 선생님 앞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군포에서 지팡이 짚고 산책 나오신 리영희 선생님을 뵈었다. 힘든 발걸음을 옮기시는 선생님의 눈이 젖어 있었다. 잡은 손이 떨렸다.

새삼스럽게 선생님들을 떠올리는 것은 오늘의 언론, 아니 언론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치욕스러운 ‘기레기’란 모욕을 당하면서도 우리 언론인은 분노를 참는다. 아니 느끼긴 하는가. 분노는 가슴속에만 끓을 뿐 누구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어떤 기자는 취재의 경우가 아니면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면 묵묵부답이다.

오늘의 언론을 말하려면 먼저 ‘기레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슬픈 현실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자가 우리 언론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언론의 전파력은 가공스럽다. 특히 방송매체의 발전은 누군가 말했듯이 ‘핵폭탄’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부독재자들은 제일 공격목표를 방송국으로 삼는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이 남산에 KBS였다. 당직 아나운서였던 최두헌·박종세는 담 넘어 남산 숲 속으로 도망쳤다가 새벽 5시 방송에 대한 책임감에 총구 앞에서 덜덜 떨며 방송을 했다.

▲ ⓒ청와대 갈무리

길고도 험난한 지금까지의 가시 밭 길이 다시 시작됐다. 기자들이 느끼는 통한의 수치를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처와 자식새끼들 둔 채 목이 잘려 책 보따리 끼고 외판 다니다가 홧병들어 죽은 기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멋대로 잡아가 주리를 틀고 골병들게 해서 죽인 기자가 얼마나 많더냐.

중앙일보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문화부장 정규웅과 작가 한수산을 잡아다가 반쯤 죽여놓은 전두환 독재. 한수산과 친구라는 이유로 잡혀가 오뉴월 복날에 개처럼 얻어맞고 폐인이 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 박정만은 그토록 사랑하던 세상을 등졌다. 변기에 앉은 채 똥만도 못한 세상을 떠났다.

펜을 빼앗긴 작가와 기자들이 사는 보람은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이었던가. 누가 내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무엇을 했느냐. 욕하고 술 마시며 살았다. 부끄럽지 않으냐.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그 때 친구이던 기자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오장육부 다 빼 버리고 독재자에게 아양을 떨어 언론사 사장되고 장관 되고 국회의원 된 기자들이 얼마나 많더냐. 지금도 금배지 달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변인 됐다고 TV에 나오는 불쌍한 인간들. 그들의 양심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축배를 들겠지.

■기자의 영혼

세상을 바꾸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장관도 아니고 당 대표도 아니고 언론이라고 굳게 믿는다.

유용원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가 미국이 거부한 한국형전투기(KF-X) 4대 핵심기술을 10년 내 자체개발할 수 있다고 호언한 국방장관의 얼빠진 장담을 비판한 기자의 기사가 오히려 언론의 기사가 되는 세상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형평성과 상관이 없다. 누구보다 기자들이 잘 알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정교과서 반대세력이 북한의 지령을 받지 않았는지 의심이 된다고 지령설을 제기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의 인가. 이런 인간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이 언론이다.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국정화 반대 세력의 북한 지령설’에 대해 말했다.

“지금이 몇 년도냐. 이런 사회에서 아직도 그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창피하다”

기자들이 할 말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한 것이다. 이 보도를 읽는 조·중·동과 종편의 기자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기레기’를 떠올리며 자조의 웃음을 짓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지상파 3사는 나라의 운명이 걸렸을 수도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받아쓰기 정도로 가볍게 보도하고 TV조선과 채널A는 '좌편향' 트집 잡기에 정신이 없다. 절망적인 우리 언론의 벌거벗은 나신이다.

그나마 JTBC의 불만족스러운 고군분투 가운데 종편 왜곡과 은폐가 계속되고 있지만 참된 교육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치솟는다. 기자들이 나서야 한다. 무엇이 정의냐. 기자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배웠느냐. 배운 대로 해야 한다.

이제 고등학교 학생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단언컨대 초등학생도 거리를 메울 것이라고 믿는다. 4·19 당시 우리는 수송초등학교 애들이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불통의 대통령도 애들의 소리는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기자들이 써야 한다. 역사의 기록자라라는 사명으로 써야 한다.

전국의 대학교수들과 대학생들이 거리를 메우기를 정권은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명장은 후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와 주고 싶다. 10년 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새 해 기자회견에서 차분한 어조로 직접 한 말이다.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판단,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정권이 역사를 '막 다루겠다' 하게 되면,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그 정권의 입맛에 맞게, 편의에 맞게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그 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래서 역사 문제는 전문가와 역사학자에게 맡겨서 평가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7개 대학 학생 4만 2천여 명이 ‘국정화 불복종 선언’을 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학생들도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는 가족사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박근혜 선배님! 이건 쫌 아닌 것 같습니다!" 라는 손팻말로 국정화 중단을 촉구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대학생 대표자 시국회의’ 소속인 서울대, 고대, 이대 등 36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은 공동선언문을 통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며 민주주의 퇴보”라면서 “대학생들은 이를 좌시할 수 없으며 이제 한목소리로 행동한다”고 밝혔다. 거리에서 만난 외국인들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했다. 이들은 미국, 프랑스, 타지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국적을 갖고 있었다.

“정부가 역사를 서술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중요한 건 객관성을 지켜야 한다"

"역사엔 언제나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이를 반영한 역사책이 필요하다"


독일언론 타쯔(Taz)는 "대한민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대통령의 무릎 위에서 노는 애완견' 이라고 권력의 개가 된 한국의 언론 상황에 빅 엿을 먹였다. 기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권력의 개라는 소리다.

학생들은 “대통령께서는 우리들이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하게 될까봐 우려스럽다고 했는데, 그 우려가 진심이라면 역사교과서를 바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부끄럽지 않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말했다.

■단언컨대

양심은 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언컨대 나는 움츠렸던 기자들의 영혼이 긴 잠에서 깨어나 큰소리 치고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대표적 ‘기레기’라고 불리는 후배한테 물었다. 너 이 담에 뭐라고 변명할거냐. 그의 대답이 결연했다. 이제 달라지겠죠. 말이라도 고마웠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절대다수의 국민은 강제로 종북이 됐다. 문재인의 아버지는 친일이 됐고 인민군이 됐다. 이런 국민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심정은 어떤가. 이런 보도를 보는 기자들의 생각은 어떤가. 분명히 미친 소리라고 질책해야 한다.

말도 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스스로 기사 검열을 하는 기자들의 머릿속에는 존경하던 송건호·리영희 선생의 이름도 없고 언론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목이 잘리고 외판사원을 하다가 울화병으로 숨 진 선배 동료들의 죽음도 까맣게 잊었다. 잊은 것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식들이 살아 가야 할 이 땅을 이대로 그냥 둘 것인가.

친일이 항일이 되고 매국이 애국이 되는 역사를 자식들이 배우는 이 땅의 교육을 그냥 보고 있을 것인가. 저녁에 거리를 광화문에 나가보라. 청계광장에 나가보라. 자식, 동생 같은 중고등 학생들이 팻말을 들고 추위에 떤다. ‘올바른 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이 피켓이 안 보이는가.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 중 작가와 언론인 등 지식인에게 사형·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내렸다. 규모는 엄청났다. 12만 5천 명이 재판을 받았고 9만 5천 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사형도 엄청났다. 그들 중 언론인들이 억울하다고 했다. 자신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살았다고 했다. 드골이 말 했다. ‘그것이 죄다’ 침묵이 죄라는 것이다. 언론인이 침묵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정의를 말해야 한다.

이제 기자들이 나라를 위해 입을 열어야 한다. 기자들이 언론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그것이 독재를 막는 애국이다. 언론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에 대한 속죄다. ‘후배들을 믿는다’ 선배들의 호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기자들은 ‘기레기’란 불명예를 벗어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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