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벨] [셀마] 인류 최고의 악마, 집단차별의 소용돌이

영화관에까지 갈만한 영화를 찾지 못해서,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이거저거 찾아보았다.[스파이] [인사이드 아웃] [버틀러] [크로싱 아웃] [노벰버 맨] [벨] [셀마]와 [강남70] [한공주] [나의 절친 악당] [무뢰한] [협녀].

[협녀]와 [인사이드 아웃]은 영화관에서 보지 않길 잘 했다. 나머진 재미있지만, 눈에 쏘옥 들어오는 건 [버틀러] [크로싱 아웃] [벨] [무뢰한] [한공주]였다. 이번엔 [벨] [셀마] [버틀러]로 인종차별을 이야기하겠다.

초등시절, 만화책이나 영화에서 징그럽게 생기고 미개하여 원숭이나 다를 바 없다는 듯한 분위기로 흑인 이야기를 만났다. 그러나 미국에서 흑인들이 부당하게 인종차별을 당하며 살아간다는 걸 안 건, 초등 5학년 즈음에 국어책의 ‘톰 아저씨’라는 글에서 처음이다.

그런데 고등시절 충장로에서, 흑인이 대낮에 이어폰을 끼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흑인과는 사뭇 달랐다. 나보다 2배는 됨직한 거대한 체구에 거의 연탄색이라고 할 만큼 샛까만 피부 그리고 바짝 말라붙은 깡-곱슬머리.

내 눈엔 사람이 아니라 괴물 짐승으로 보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얼어붙은 채 서 있는 날보고, 그가 새하얀 잇빨을 활짝 드러내어 씨익 웃었다. 흥얼거리는 웃음소리였겠지만, 그 새까만 피부에 하얀 잇빨 때문인지, 으르렁대며 날 잡아먹을 듯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자리에 한참을 얼어붙어 있다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 저게, 고릴라지 사람이야?” 백인들이 왜 그들을 짐승처럼 차별하는지 충분히 절감했다.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 뒤로 난 몇 년 동안 ‘흑인 차별주의자’였다.

대학시절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광주 미국문화원’을 들랑거리다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뿌리]를 12부작 드라마로 만나서 미국 흑인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실감하고서야 그 ‘흑인 차별주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칼라 퍼플] [아미스타드] [노예12년]을 비롯한 ‘흑인 인종차별’ 영화로 그들의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버틀러]와 [벨]은 상당히 다르다.

이 두 영화는 육체적 고통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심리적 고통을 주로 그려낸다. [셀마]는 1965년에 미국 남부 알라바마의 작은 도시 셀마Selma에서 ‘흑인 투표권운동’으로 ‘흑인 인종차별’을 극복함에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낸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활약을 보여준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이 거룩한 말씀의 실천을, 다큐 스타일로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운동으로서 숭고한 감동은 있지만, 애잔한 감성적인 감동이 없어서 대중적 재미가 별로 없다. * 대중재미 D+(내 재미 A0), * 영화기술 A0, * 감독의 관점과 내공 : 민주파 A0.

[벨Belle]은 18세기 말 영국이 노예무역의 중심지였을 때, 귀족이 흑인여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 주인공이다. 귀족 가문의 예쁜 상속녀이지만, 흑인 모습이고 여자이어서 그녀의 앞날이 꼬이고 꼬여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시나리오란다. 18세기 말은 근대 부르주아 세력이 무르익어감에 따라서 귀족 친화세력(보수파)과 서민 친화세력(진보파)으로 갈라지는 초창기이다.

바꾸어 말해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각이 아직 깊지 않아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한 민권의식이 보수파에게도 잔재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흑인 혼혈여자 귀족이라는 그녀의 처지가 그 민권의식에 새로운 영역인 ‘흑인의 민권’에 일찌감치 중요한 씨앗을 심는 계기가 된다. * 대중재미 C+(내 재미 A0), * 영화기술 A+, * 감독의 관점과 내공 : 민주파 A0.

‘the Butler’는 미국 대통령의 잔심부름꾼인 집사라는 뜻이다. 1952년부터 1986년까지 34년간 8명의 대통령을 보필했던 ‘유진 앨런’이라는 버틀러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리 다니엘스 감독은 그의 일대기를 그대로 뒤따라가는 개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상의 갈등을 웅숭깊게 그려낸다.

한 쪽으론 살아남기 위해 백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순종하는 생각과 자세가 몸에 밴 집사 아버지, 다른 한 쪽으론 인종차별를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하며 마침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측근에 이르는 운동권 아들. 초반에는 서로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나쁜 쪽으로 몰아세우다가, 그 사이에 엄마가 끼어들어서 그 갈등을 조절하면서 조금씩 접점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상투적이지 않고 상당히 힘들고 비비꼬이면서 실감나기 때문에, 그 화해가 단순하게 해피엔딩만을 위한 억지가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하고 깊어서 더욱 좋다.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도 그 시대의 갈등을 대표하는 깊이가 뒤로 갈수록 더욱 사무치고 감동이 우러나온다.

* 대중재미 C+(내 재미 A+), * 영화기술 A+, * 감독의 관점과 내공 : 민주파 A+.( 주인공 포레스트 휘태커를 여러 번 만났는데, 심드렁하게 보아오다가, 어느 영화에서 범상치 않은 그의 연기력이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가 최고다. 이 영화가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듯하다. 그 못난 얼굴과 그 연기력에 기립박수!!! )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73047&videoId=42664

이 두 영화는 겉으론 개인의 삶이 초점이지만 속으론 사회적 갈등이 함께 어우러져서 그 어느 쪽을 선과 악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굳이 강변하거나 선동하지 않고 감흥이 잔잔하게 조금씩 깊이 다가온다.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알고서, 장면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음미하면 더욱 좋다.

60시절까진 인종차별로 갈등이 극심했는데, 70시절부터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갔다. 그리곤 마침내 혼혈흑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정도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아직도 그 잔재가 끈끈하게 남아있지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부럽다.

우리나라의 한국판 인종차별인 ‘지역차별’은 더욱 꼬이고 심화되어가니 너무나 심난하다. 흑인 · 유태인 · 이슬람 · 조센징 · · · 그리고 전라도! 이 세상의 어처구니없는 차별들의 폭행과 억압. 그 집단적 소용돌이를 보노라면, 인간 자체가 섬뜩하고 지겹다.

나에겐 그 반대쪽에서 분노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이것도 소용돌이이긴 마찬가지이다. 달래고 또 달래 보지만, 너무나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콘트롤이 잘 안 된다. 나마저도 이러한다면,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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