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 강천사는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강천산 안에 있다. 강천산은 입장료가 3천원인데, 강천사를 둘러보는 ‘관람료’가 아니라, 산의 풍광을 구경하기 위한 ‘입산료’다. 병풍폭포로 시작하는 산은 아름답지만, 절은 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메타세콰이야 숲길을 걷고, 계곡에 발을 담그고, 모과나무 아래서 ‘힐링’을 하면서도, 절을 들러보지는 않았다. 중생들이 외면하는 절은, 산의 들러리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왜 절에 갈까? 가서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 있고 싶어 할까? 늙은 나무 기둥의 벌어진 틈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득한 옛 이야기들, 지친 육신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숲이 움직이는 소리, 스님이 차를 한잔 내어 줄 것 같은 기다림, 그리고 기약 없는 것이지만 혼자 소망했던 것들을 기왓장에 쓰면서 뭔가 조치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얻어가는 것 아닐까?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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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꼭 맞배지붕의 국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볼 품 없는 석불 하나, 파란 수국, 배롱나무 그늘 아래서도 좋다. 강천사는 오층석탑과 당우 몇 채, 겨우 사지(寺址)를 면한 수준이지만, 그 석탑에 남은 한국전쟁의 흔적들, 왜 비구니가 많이 살았는지, 지네가 인간으로 변하려다 실패한 전설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또한 그런 것 하나 없다 하더라도, 스님이 먼저 말을 건네면 안 되는 것인가? 당우 하나를 비워 차실을 마련하고, 문을 활짝 열고, 절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님이 차라도 한잔 대접하면 좋으련만. 계곡에 깔고 앉으라고, 나이롱 돗자리를 한 100개쯤 사서 오는 사람마다 무료로 나눠주면 좋으련만. 점심 공양마다 국수를 한 솥 삶거나 밥을 비벼서 절에 들른 사람들에게 양껏 먹게 하면, 아니 그러면 절 살림이 거덜 나려나?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다. 절 밥 공으로 먹고 가면, 부처님이 가만 안 있는지 다 안다. 불교를 한마디로 하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아닌가. 보시는 뭔가를 주는 것이고, 무주상은 내가 아무개에게 뭔가를 줬다는 마음(相)이 없는 것. 나는 줬는데 너는 안 주냐 하는, 그 상이 분별이고 집착이니, 댓가 없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주상보시는 결과적으로 모순이다. 댓가 없이 줄 때, 댓가 없이 끝나는 경우는 없다. 나는 무상으로 주지만 너에게는 상이 남는 법. 무언가를 갚으려고 하고, 고마워하는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연등이, 국수 대신 연등이, 법당에 더 달아놓을 틈이 없이 들어찰 것이라고 나는 주제넘게 속가의 컨설팅을 하는 것이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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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옆에 커다란 범종이 맨땅에 서 있다. 종은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것이다. 그 뒤로 펼침막이 있다. ‘범종각 건립 불사’라고 쓰인.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다. 비를 맞는 종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불자여! 비를 맞는 종은 얼마나 안타까운가?’라고 말하는 듯,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의 그 무감각 때문이다.

그것은 무심(無心)인가? 작은 절에 저렇게 큰 범종이 필요한지도 의문이지만, 스레트 지붕이라도 얽어서 임시로 달아놓지, 어디 화물 부려놓듯이 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강천사는 선운사 말사다. 불교는 영남불교, 치마불교, 노인불교라 하여, 박근혜의 지지기반과 일치하니, 신도가 적은 전라도의 절들이 살림살이가 형편없는 줄 안다. 하지만 강천사는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천년가람이고, 무엇보다 절 앞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운사 주지스님이 좀 신경을 쓰셔서 강천사를 살려냈으면 하는 발원인데, 이 발원을 강천사 부처님에게 빌어야 하는지, 선운사 부처님에게 빌어야 하는지, 맨날 분담금만 걷어가는 자승 총무원장 스님에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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