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변산공동체에 갔을 때의 일이다.

윤구병 : 아마 한 10년 쯤 전일거여. 내가 살던 변산 공동체에 스님이 찾아왔어. 생명평화순례 길에 들른 거지. 동행했던 한 20여분의 사람들과 함께 왔어요. 저 앞에 장독이 널어진 널찍한 마당에서 만났지. 나는 속으로 스님이 순례 길에 들러주어서 기분이 참 좋았지.

그런데 첫 만난 자리에서 대뜸 그랬어. 여기 오셨으면 나한테 삼배를 해야 한다고. 내가 짓궂잖아. 툭툭 땅바닥을 치면서 스님, 나한테 큰절 세 자리해 그랬지. 그랬더니 스님이 “왜 해야 해?”하더라고.

ⓒ이광이

그래서 내가 나이도 많고 절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했지. 머뭇거리길래 한마디 더 했지. 대웅전에 나무로 깎은 부처나 쇠 부처 한테 절할 때 왜 절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절 했어요? 그냥 해, 그랬지. 도법 스님이 순진하잖아. 절을 하더라고. 나는 빚지고는 못사는 사람이니까. 스님, 이제 내 절 받으시오. 아마, 내 절이 더 공손할 거요. 그러고는 내가 세 자리를 극진히 해 바쳤어.

나 : 스님은 삼배를 왜 했어요? 하란다고 하셨어요? 혹시 선승들이 선문답하는 법거량(法擧量)은 아니었는가요? 조주스님 같은.

도법스님 : 법거량은 무슨?

나 : 조주의 ‘주감암주(州勘庵主)’ 있잖습니까?

※ 주감암주
<조주가 어느 암자에 도착해서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주인이 나오더니 주먹을 들었다.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조주가 다른 암자에 도착해서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주인이 나오더니 역시 주먹을 들었다.

조주는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고 말하고는 그에게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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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스님이 하룻밤 묵어가려고 어느 암자를 찾은 모양이다. 그런데 주인이 다짜고짜 주먹을 들어 보인다. 주먹감자, “엿 먹어라!는 뜻이다.” 거기에 “개놈의 자식”하고 댓거리를 해주고 싶다. 하지만 조주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떠난다. 두 번째 암자에서 똑같은 일을 당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르다.

첫 번째 암자에서 조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인다. 마음이 크다. 물이 얕다는 것은 네 속이 밴댕이만 하다는 것이다. 나 같은 큰 배가 어찌 너 정도를 상대하겠는가! 그러고 떠나 두 번째 암자를 찾아 조주는 걷는다. 걸으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 마음이 저 주먹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화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이 큰 배가 저 얕은 물에 흔들렸구나!”하고. 크기는 하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이다.

두 번째 암자에서는 달라진다. 그 주먹을 보고 인정한다. “당신은 이미 깨달은 분이시군요. 그러니 뭔가를 줄 수도 뺏을 수도 있고, 나를 살리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하고 받아들인다. 내 마음이 그 주먹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화를 참는 것이 아니고, 화가 안 난다. 본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니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이리라. 첫 번째 마음은 그물에 걸리지만, 두 번째 마음은 그물에 안 걸린다.

나 : 그러니까, 윤구병 선생은 암주의 흉내를 낸 것이고, 도법스님은 조주스님처럼 한 것 아니냐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판정승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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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 그런 것이 어디가 있어? 하라고 하니까 했지. 생각해봐, 순례 길에 먼 길을 걸었을 거 아녀? 피곤하고 지치고,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그 당시에는 그랬어. 제주에서 서울까지 걷는다, 얻어 먹는다, 얻어 잔다. 얻어 먹고, 얻어 자려고 왔는데, 밥 줄 사람, 재워줄 사람이 절을 하라고 하잖어? 처음에는 절까지 하냐 했는데, 돌아보니 지치고 굶주린 ‘도반’들이 보이지 않나.

그래서 넙죽 했지. 얼른 절하고 얻어 먹고, 얻어 자자. 그랬지. 그렇다고 거지는 아니잖어? 중들을 걸사(乞士)라고 부르지. 얻어먹을 권리를 가진 사람. 얻어먹는 것이 정당한 사람. 법거량이라고? 그런 것이 관념이지. 실제는 안 그래. 관념 속에서 비가 내리나? 비가 안 내리니까 빗속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그런데 실제로는 비가 내리잖어? 비 맞고 돌아다니는 사람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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