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빠져나간 봄의 흙은 들뜬다. 그 빈 통로를 따라 종자는 싹을 틔운다. 들은 보리 싹으로 푸르다. 고사리는 고사리 손을 내밀고 있고, 봉분의 한 귀퉁이는 움푹 꺼졌다. 겨울이 무너진 자리에 삽으로 흙을 떠다 메운다. 억센 것들은 낫으로 베고, 나는 흙과 술잔 위에 절을 올렸다.

내 목적지는 무덤이었다. 오직 무덤을 향해, 남으로 천리 길을 달리는 것은 바그너의 나흘짜리 악극을 듣는 것 만큼이나 괴로운 일이다. 나는 정처 없이 이탈했다. 갈 곳이 없이 도착한 곳은 부여였고, 나는 부여에서 갈 곳을 찾았다. 정림사지! 오래 전 수학여행을 다녀갔던 기억이 이끌었을 것이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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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마다 옥개석의 끝부분이 둥그렇게 말려 올라간 5층 석탑. 1500년전 백제 사람들의 감성과 단아한 손길이 묻어 있는 곳. 탑을 올려보고, 한 바퀴 돌아보고,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는 왕명을 받고 이 절을 처음 설계했던 사람처럼, 탑 주위에 흩어진 돌 무더기 위를 걸으면서 상상한다. 거기 불국정토를 꿈꾸었던 사비성 사람들이 있었고, 가람을 빙 둘러 회랑이 있었고, 탑 뒤로 불상을 모신 목조건물이 있었던 것을 한번 그려보고, 지우고 다시 짓고, 그러면서 느릿느릿 돌아다닌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벌판에서 탑 하나, 석불 하나를 가지고 혼자 한 세상을 그려보는 일은 오직 폐사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정처 없이 가다가 갈 곳이 생긴 나는 다시 남으로 남으로 달려, 강진의 월남사지에 도착했다. 시제를 모시러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나는 절터만 두 곳 들렀는데, 절터란 것이 사실은 절의 무덤인 셈이니, 그날 인연이 그랬었던 모양이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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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 3층 석탑은 왜 그리 아름다운지, 모양은 다르지만, 평석 밑 받침돌의 흘림은 정림사지와 많이 닮았다. 5층 석탑은 도심 한 가운데 세워져 세련되고 귀족적인 모양새고, 3층 석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소박한 서민의 모습이다.

5층 석탑은 국보 9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3층 석탑은 보물인데, 나는 둘의 우열을 가를 수 없다. 월남사지는 발굴이 한창이다. 거기에는 석공과 기다림에 지친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전설로 남아 있다. 베일로 덮어놓은 땅 속에는 그런 옛 이야기들이 가득할 것이다.

사지라는 것이 고작 석탑이나, 비석, 석불 따위의 온전하지 못한 것들, 상부는 사라져버린 기단이나 초석들, 그리고 짜 맞추기 힘든 돌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그냥 나오기도 허망한 일이다.

어디 걸터앉아 석공의 처가 좀 더 참고 기다렸으면 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어느 민가에서 장독대 받침으로 쓰고 있던 돌이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이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문화재 발굴 팀의 표정은 어땠을까,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 조각난 퍼즐을 짜 맞추느라, 절터 구경은 절 구경보다 시간이 더 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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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몇 시간짜리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오기로 들어보려다가 나자빠진 적이 있다. 이제는 누구의 생몰연대와 사조와 시대적 특징이나 뭔가를 주워섬기고, 그런 것이 지겹다.

대단한 지식인양 하는 것도 살다보니 별 쓸데가 없다. 그냥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정처 없이 나 댕기고, 기약 없이 만나고, 차라리 텅 빈 곳에서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이 더 홀가분하다. 그러기에 사지만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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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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