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스님들이 화를 낼 수는 없으므로, 나의 무례는 그저 유쾌한 웃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퇴옹 성철스님 입적 이후 나는 짓누르는 숙명 같은 것을 느껴왔다. “아! 이 땅의 큰 스님 계보가 여기서 끊기는 것인가? 누군가 그것을 정리해야 하는데…” 하는.

▲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이광이

나는 불교에 대한 부채 같은 것을 정리하기 위해 4가지 마음을 내었다. 여기서 끊기면 어쩔거나 하는 인(仁)한 마음. 큰 스님들의 기상을 바로 전해야 한다는 의(義)한 마음. 그 분들의 행적을 널리 기리는 예(禮)한 마음. 거기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지(智)한 마음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본업은 팽개치고, 후배를 포함하여 연인원 3명으로 1년여의 장구한 세월 동안 12,000여명의 조계종 스님들의 법명과 행적을 연구하여, 5대 큰스님의 계보를 대략 완성했다. 하지만, 미진한 부분이 많으며, 더 연구가 이뤄져 보충해야 할 대목이 많음을 인정한다. 함께 연구한 후배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것이 그의 밥벌이에 이로울 것 같아 생략했다.

첫 번째 큰스님은 ‘무진장(無盡藏)’ 큰스님이다. 무진장은 무주, 진안, 장수로 황인성씨의 선거구였던 그 무진장이 아니다.(지금은 임실까지 붙어서 4개 군이 한 선거구지만) 무진장은 양적, 질적으로 다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크기를 따질 때 이 보다 더 클 수는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다. 첫째 큰 스님이 되는 이유다.

무진장 큰스님은 1956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비구계를 받았다. 조계사에 40여년 머무르면서 청빈하게 살았다. 자기 절, 돈, 승용차 등 일곱 가지가 없다 해서 칠무(七無)스님이라 불리기도 했다. 재작년 열반에 들었다.

▲ 전남 화순 운주사 돌부처.ⓒ이광이

두 번째 큰스님은 ‘원학(圓學) 큰스님’이다. 원학 스님은 좀 빨리 불러보면 왜 큰스님이 됐는지 알 수 있다. ‘원’을 좀 작게 하고, ‘ㄴ’을 뒤로 붙이며 좀 크게 부르면 ‘워낙’이 된다. 자연스레 큰스님을 붙이면 ‘워낙 큰스님’이 된다. 무진장 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워낙 커서 두 번째 큰스님으로 삼았다. 조계사 주지를 지냈고, 현재는 봉은사 주지스님이다.

광우병으로 난리가 한창일 때, 종로경찰서장이 찾아와 “광우병 대책위 7명이 조계사에서 농성 중인데 연행에 협조해 달라”고 하자 “조계사에서 농성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국가와 가정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만 있다.”고 답한 일화가 유명하다. 취미로 그림과 서예를 한다.

조계종 총무부장은 전 사찰의 주지를 물색, 천거하는 막강한 자리다. 그 자리에 있을 때 개인전을 열어 작품이 매진됐다는 워낙 큰스님 뒷모습도 동시에 전한다.

▲ 전남 화순 운주사 부처. ⓒ이광이

세 번째는 큰스님은 ‘진정(眞正) 큰스님’이다. 선승으로 안거와 만행을 거듭하여 정처가 없다. 승적에 법명만 남아 있을 뿐, 뚜렷한 행적이 없다. 그래서 진정 스님을 세 번째 큰스님으로 모셔야 하느냐에 다소 의문을 갖기도 했다.

본래 큰스님, 원래 큰스님, 아주 큰스님 등이 혹시 계신지 찾아 보았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가 바탕하고 있는 것이 조계종 승적이라, 요건은 부합한다고 보고, 세 번째 큰스님으로 삼았다. 이 부분 조사가 이뤄지는 대로 보충해야 할 대목이다.

네 번째는 ‘제법(諸法) 큰 스님’이다. 제주도 영암사 주지로 주석하고 계신 비구니 스님이다. 여기서 제법이란 제법무아에서 나온,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에 바탕하며,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무진장 크거나, 워낙 크거나, 진정 크지는 않더라도 제법 크다는 뜻이다. “제법이네, 제법 잘 하네”와 같이 결코 얕볼 수 없는 수준이 제법이다. 제법 큰스님은 1976년부터 10년간 제주양로원에서 노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혼자 사는 노인, 장애인들을 돌보며 제법 큰일을 해내고 있다. 그래서 작년에 제주특별자치도가 주는 ‘김만덕상’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큰스님은 ‘지만(智滿) 큰스님’이다. 지만 큰스님은 과연 큰스님인가에 대해 논란의 소지가 있다. 큰 스님은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지만 크다고 하니! 연구진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았던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객관화라는 것이 진정 과학적인가에 회의를 품고, 교향곡의 스케르쪼(농담) 악장처럼, 한 분 정도는 모셔야 하지 않느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부분 연구 성과가 완벽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올 것으로 짐작한다.

▲ 전남 화순 운주사. ⓒ이광이

지만 큰스님은 화엄사로 출가하여, 1975년 월하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현재 조계종 재심 호계위원이다. 호계원은 속가의 법원 같은 것으로 고법판사 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5대 큰스님을 정리하니, 속이 좀 후련하다. 많은 아쉬움은 거듭되는 정진과 또 후학의 몫으로 남긴다. 이것 역시 미뤄두다가 ‘무진장 큰스님’이 입적, 열반한 것을 보고 더는 늦출 수 없어 서두른 것이다.

무진장 큰스님은 “불교란 믿는 것이 아닌 닦는 것이다. 고요함을 즐길 줄 모르면 불법을 알기 어렵다”는 법어를 남겼다. 입적(入寂)은 사바세계를 떠나 고요함에 든다는 뜻이다.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바람이 촛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나무관세음보살!

**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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