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이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가슴으로 부러워한다.’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 부치는 헌사다. 까뮈는 스무 살 때 알제리에서 이 책을 처음 읽고, 20년이 지난 후에 이 글을 썼다. 조금 읽다가 접어놓고, 가슴에 꼭 껴안고,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혼자의 공간을 찾아가던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다! 추천서문의 백미다.

그런데, 역자 김화영이 쓴 짧은 또 하나의 서문이 이에 못지않다.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그 무에서 겨울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 어둠,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저 빛나는 헌사 뒤에 시작되는 장 그르니에는 햇빛을 반사하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히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데 활력소일 것이다.’

‘케르겔렌 군도는 선박이 다니는 일체의 항로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 삼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해안에는 흔히 안개가 끼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곳에 접근하는 선박들은 극도로 경계한다. 그 고장의 내부는 완전히 황폐하고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케르겔렌 군도에 대한 묘사 앞부분에는 ‘인간이 혼자 살다가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다.’는 암시가 있다.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까뮈)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불교적 사유와 그저 읽히는 대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감각들, 그것을 한번 베껴 보는 것으로 나는 족하다. 하지만, 섬이 무엇인지는 두 번째 우린 차가 맛있듯이, 한 번 더 읽어보면 잡힐 듯하다.

**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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