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 가는 길에 울 엄니 그러신다.
“치매하고 건망증하고 어떻게 다른 줄 아냐? 뭔 생각을 끝까지 해서 생각이 나면 건망증이고, 그래도 생각이 안 나면 치매라더라. 요새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생각이 안 날 때가 많더라.”
“…”
“치매에 걸리면 애기가 되지 않냐.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자식이 그 부모의 부모가 돼야 한다더라.”

▲ ⓒ이광이

태안사는 절간처럼 조용하다. 남으로 송광사와 선암사를, 동으로 화엄사와 쌍계사를 말사로 거느리던 옛 영화는 없다. 지금은 말사였던 화엄사의 말사가 되었다. 나무로 빚은 찬란했던 것들은 불타 사라지고, 돌로 깎은 부도만 남아 그 전설을 전한다.

스님이 이불을 한번 털고는 들어간다. 마른 피부에 허옇게 일었던 비늘들이 떨어지면서 반짝인다. 조영래는 어느 방에 머물렀을까? 조태일은 어느 방에서 태어났을까? 물어볼까 하다가 부질없다.

▲ ⓒ이광이

조영래는 태안사에서 머물다, 1990년 12월12일 귀천했다. 그는 ‘한 문장에 담배 한 대’를 피웠다고 한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언제 읽어도 가슴 서늘한 문장이다.

책을 찾아보니, 1981년에 쓴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구속기소한 트럭 운전사, 미안한 것 두 가지가 남았다. 하나는 검사 의견을 들어 구형을 덜컥 1년6개월로 해 버린 것, 또 하나는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를 권하지 못한 것’ 변호사는 8년에 불과했지만, 남긴 발자국이 크다. 그는 폐암으로 43세에 떠났다.

조태일은 태안사가 탯자리다. 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한다. ‘산에 올라 가만히 살펴보면 태산도 티끌들의 세상이더라. 바다에 나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다도 물방울들의 세상이더라.’ 그러므로 ‘중생이 앓으면 부처가 앓는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가 아프다'는 말은 조영래가 제일 좋아했던 말이라고 한다. 엄혹한 시대의 턱 밑에 ‘식칼’을 들이댔던 조태일은 간암으로 57세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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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성을 가진 두 사람. 하나는 거기서 낳고, 하나는 거기서 죽고. 하나는 술 때문에, 하나는 담배 때문에, 하나는 간암으로, 하나는 폐암으로. 하지만 안경환의 표현처럼, 그것은 ‘시대 암’이 아니었을까?

태안사는 여순항쟁 때 불타버려, 기와가 검다. 하지만, 바람 하나, 돌 하나, 모퉁이 하나에 사연이 많다. 엄니는 멀리서 탑을 돌고 있다. 돌아오는 길, 산그늘이 길다. 일주문 아래, 아직 분이 나지 않아 검붉은, 장두감을 네 쪽으로 썰어 말린, 곶감을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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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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