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어느 흐린 가을 저녁, 궁핍한 시대의 한 길모퉁이 전파사 라디오에서 크레센도로 흘러나오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들었을 때, 나는 흡사 감전되듯 온 몸이 전율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내게 클래식은 이런 식으로 오지 않았다. 저것이 선천적으로 오면 천재이고, 후천적으로 올려면 최소한 5년은 걸린다. 말러처럼 탐미적 질병 같은 음악은 중독되었을 때, 비로소 저 경지에 이른다. 장삼이사에게는 말러의 서정적 아다지오라 하더라도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긴 세월의 숙성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나비처럼 나풀나풀 다가오는 것이다.

▲ ⓒ이광이

내게 클래식은 멘델스존(1809~1847)의 이야기 속에서 왔다. 멘델스존은 함부르크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38년의 풍요로운 삶을 마쳤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부드럽고 따스하다. 그는 17세 무렵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보고 느낀 것들을 우편엽서에 적어 누이에게 부쳤다. 봄의 노래, 베네치아의 뱃노래, 흰 구름, 오월의 미풍 같은 것들이다.

매우 당연하다. 17세의 감수성이 오월과 바람과 구름 같은 것들을 만났을 때, 감흥이 일기 시작하며, 무언가를 적어 가족에게 보내는 것은. 그런데 엽서를 독일어로 보낸 것이 아니라, 콩나물로 보낸 것이다. 여기서 나는 ‘흡사 감전되듯 온 몸이 전율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거 뭐임? 오, 나의 17세는? 코카콜라 광고는 정확히 17세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때 콜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 노는 방식이 다르구나! 언어가 아닌 콩나물로, 그들은 웃고 속삭이며, 우리가 몰랐던 다른 언어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2세기 전에, 아니 1000년 전부터. 가까이 가보자, 저들은 어떻게 얘기하는지! 그것은 돈오(頓悟)였다.

모차르트는 곡을 쓰다 막히면 허공에서 한 조각을 베어온다고 하고, 독일의 어느 의사는 감옥에서 악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고, 베토벤은 음악을 신의 언어라 하며, 어느 새벽 신으로부터 전해들은 소리들을 콩나물로 바꿔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선사들의 무용담이 줄을 이었으니.

▲ ⓒ이광이

그 동네 기웃거린지 10년이 넘었다. 음반 사랴, 오디오 사랴, 진공관이 어쩌고 TR이 어쩌고, 황학동 헤매고, 교보의 회원 등급 올라가고… 그래서 이런 봄날 멘델스존의 무언가(말이 없는 노래) 중에서 ‘봄의 노래’를 들으면 기가 맥히다는 것을 알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을 듣기 위해 앰프를 예열하는 50대에 도착했다.(이 과정에서 마누라와의 불화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짤리기 전에 준비해야 짤린 뒤에 짜른 놈 보란 듯이 놀 수도 있고, 짤리기 전에 떠날 수도 있다. 뭐든지 짧은 시간에 되는 것은 없다. 낭만주의 피아노 소품의 정수, ‘무언가’ 49곡을 들으면서 멘델스존을 따라가면, 힐링의 입구가 보인다.

**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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