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 땅은 둘러보면 역시 요정자리가 제격이다. 로마 귀족들이 사는 곳처럼 적당한 언덕 위에 시야가 넓고, 바람 불어오고, 실 계곡 흐르니, 더불어 술 한 잔 기울이기에 경회루 다음으로, 저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고관대작들이 백성의 피를 빨아 주지육림에 빠졌던 곳이, 요정 본채, 지금의 극락전(極樂殿)이다.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처녀들의 푸른 삶이 시들어갔을까 생각하면, 길상화 보살의 업보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만년에 저 땅을 내놓기로 작정한 것은 업의 닦음이리라.

▲ ⓒ이광이

저 땅은 서울의 노른자위다. 대사관저들이 줄지어 들어선 곳, 평당 수천만원을 호가하고, 보통 집 한 채에 20억원이 넘는 땅이다. 길보살이 내놓은 대원각은 7000여평, 건물이 40여동이었으니, 아무리 못 잡아도 1000억원이 넘는다. 저 엄청난 땅을 누가 가져갈까?

방법은 두 가지다. 빼앗거나, 공짜로 받는 것. 안 팔기 때문에 이건희도 살 수는 없다. 또 대통령이 아닌 이상 박정희처럼 뺏을 수도 없다. 그냥 받는 것이 유일하다.

길상화 보살의 이름은 김영한이다. “내 수백억의 재산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말로 유명한 백석의 애인. 함흥에서 시작된 시인과 기생의 사랑, ‘자야’라는 아호를 갖게 된 사연, 그들의 이별, 그리움 같은 것들은 안도현이 쓴 ‘백석평전’에 잘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그 1000억원을 갖느냐 이다.

▲ 길상사. ⓒ이광이

길 보살은 삶을 마감할 시간을 맞이하면서, 종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불교계를 비롯하여 타종교 성직자들과도 두루 만나본 것으로 안다. 많은 성직자들은 “고맙다”고 했고, 딱 한사람, 법정스님만이 “필요 없다”고 했다.

역으로 재구성하면, 저 1000억을 갖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안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모순은 서로 기대고 있다. 그래서 저 땅은, 땅주인은 가지라고 하고, 스님은 안 갖는다고 하는, 3년의 반자본주의적 세월을 거쳐 법정에게 넘어왔다.

“안 갖는다”고 말하는 것, 저것이 어렵다. 좀 갖고 싶은데 안 갖겠다고 하는 것은 몇 발자국 못가 조바심의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저것은 포카 페이스와도 차원이 다르다.

목마른 사람 앞에 만 원짜리와 물 한 그릇이 있을 때, 주저 없이 물을 집는 것, 그러니까 이해의 셈이 발하기 이전의 상태. 그 상태를 빈틈없이 유지해야 나오는 절륜의 내공이다. 저것이 반야다.

지혜는 머리가 좋거나, 학문이 뛰어나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이 모냥 이 꼴일 리 없다. 지혜는 당사자이면서 당사자를 벗어나는데서 온다. 이해 당사자로 2인칭에 속해 있으면서도, 제 삼자로서 스스로 3인칭을 유지하는 힘!

▲ ⓒ이광이

이해다툼의 수렁 속에 있을 때는 셈법이 지배하므로, 지혜라는 것이 고작 상대로부터 뭔가를 더 얻어내려고 골몰하는 관찰의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제 삼자로 빠지면, 전체를 바라보며 통찰하게 되고, 그래서 “나 필요 없으니, 너 다 가져라”하는 통 큰 해법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미련 없이, 반야다.

저 석조물은 관음보살인가? 마리아인가?
법정은 극락전에서 한번, 그리고 설법전 앞에 놓인 석조물에서 또 한번, 지혜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관음상이면서 마리아처럼 생긴, 가냘픈 여인상을 하나 세워놓음으로써 길상사는 수녀를 비롯한 타 종교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절이 되었다. 법정은 당사자이면서 제 삼자를 유지하는 절묘한 경지를 보여준다.

법정은 그 관음상 뒤편, 단풍나무 가지에 4개의 판자 조각을 걸어, 어떻게 해야 1000억원을 가질 수 있는지, 적어 놓았다.

‘여기 침묵의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
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실으라.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오, 그대 안 저 불멸의 달을 보라’고


**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