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책>에서 영화이야기로 만날 김영주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합니다.

▲ 김영주 영화칼럼니스트 ⓒ시민의소리

어렸을 때 꿈은 참 맹랑하다. 대통령 ․ 장군 ․ 로보트 대장 ․ 훌륭한 과학자 ․ ․ ․ 이라는 허황된 영웅들에게 말려든 허영을 장래의 꿈이랍시고 자랑스럽게 말하는가 하면, 탱자나무집 선영이에 신랑이 되고, 씩씩하게 달리는 기차운전수가 되고, 맛있는 만두집 주인이 되고 . . . . 나도 그랬다. 작은 누나 등에 업혀서 영화관을 들랑거리면서 코흘리개 시절부터 이미 영화매니아였다. 그 무엇보다도 ‘영화관 문지기’가 되고 싶었다. 장동휘와 박노식이가 나오는 [팔도사나이]영화티켓을 마음껏 갖는 사람. 이 영화 저 영화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언제든 볼 수 있는 사람. 들고 나는 것을 문 앞에서 제 맘대로 하는 사람. 너무나 부러웠다.

그리고 초중등 시절엔, 문희 ․ 남정님 ․ 윤정희처럼 예쁜 여자들을 아무나 보듬고 뽀뽀하고 놀면서도 ‘매’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번다는 ‘신성일’이 되고도 싶었고, 짱짱한 근육과 호쾌한 무술로 넋을 빼앗은 ‘이소룡’이 되고도 싶었다. 007도 멋지고, 황야의 건맨도 그럴 싸 해 보였다.

그런데 고교시절 어느 가을이던가? 시민관에서 [라이안의 딸]을 만나고 나선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처럼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졌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퐁당 빠졌다. 아일랜드 해변가의 찬연한 봄빛 ․ 달 떠오르는 산등성이에 검게 솟은 연인의 그림자 ․ 멀리서 다가오는 노을에 물든 두 연인의 실루엣, 그리고 가을에 담뿍 젖은 숲속의 정사.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로, 난 영화에 새로운 감각을 눈떴다. 나중에야 이 영화의 감독이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 로렌스] [인도로 가는 길]을 만든 영상미의 천재 ‘데이비드 린 감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룡과 서극 감독의 생생한 무술도 신나고, 실버스타 스텔론과 아놀드 슈발쯔제네커의 우람한 근육 액션도 끝내주며, 더스틴 호프만의 어리숙한 듯한 재치와 로버트 드니로의 이중적 광기에선 지적인 고독이 엿보이고, 샤론 스톤의 농염한 눈매와 킴 베신저의 육감적인 몸매에 온 몸이 짜릿하기만 하다.

▲ <시네마 천국>

▲ <시네마 천국>

[죠스]부터 [쥬라기 공원]까지, 스티븐 스필버그의 천재성은 백번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다. [백설공주]를 시작으로 [환타지아] [피터팬] · · · 로 이어지고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노틀담의 꼽추] · · · 그리고 [타잔]까지 이어지는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들, 정성이 가득 담겨 탄생한 캐릭터들 · 환상적인 색감과 터치 ·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백-뮤직 · 재미를 한껏 살려낸 각색 · · · .( [환타지아]는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가서 형수님이 싸 준 도시락 까먹으면서 세 번 보고, 광주에서 두 번 보고, 비디오로 열 번 넘게 보았다. 영화관에서 몰래 도시락 까먹은 촌놈의 모양새를 돌이켜 떠올리면 쓴웃음이 절로 난다. )

난 미국문화가 체질에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체질이고 자질이고 고자질이고 간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보노라면 미국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국영화는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아메리칸 드림’으로 신데렐라의 환상이라는 허영을 세뇌시키기도 하지만, 이에 저항하는 앨런 파커 감독 올리버 스톤 감독 스파이크 리 감독의 진보적인 주제의식과 짜임새 있는 연출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섬세하고 여린 감성이 섞인 그윽한 영상미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죽음으로 허전해진 구석을 채워준 감독이 장자크 아노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저력있는 대중성과 [베어]에서 속세를 벗어난 예술성, 그리고 중년 남성과 어린 소녀를 소재로 하여 그 대중성과 그 예술성을 절묘하게 접합시켜 만든 [연인]은 왜설인지 예술인지 가늠키 어렵다.

영화에는 질펀한 섹스와 잔혹한 폭력 그리고 음습한 음모로 말초적 감각을 건드리는가 하면, 훈훈한 인간애와 진지한 삶의 고뇌 그리고 생생한 현장감으로 깊은 사색을 주는 교훈이 있다. 고급문화의 우아함이 있는가 하면, 허영에 찬 현란함이 있으며, 잡초처럼 민중의 고달픈 삶에 얽힌 애환이 있는가 하면, 더럽고 추한 밑바닥 삶의 역겨움도 있다. 무엇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영화의 매력과 마력, 그리고 이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어찌 이 짧은 글에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60년대 시절에 [빨간 마후라]를 보며 철부지로 만난 그녀와, 피 끓는 열여덟에 [라이언의 딸]로 애뜻한 사랑에 눈을 뜨고, ․ ․ ․ . 막 서른 살에 <한국 영화 아카데미>에서 프로포즈를 해 보았으나, 집안에서 줄기차게 반대하는 바람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어 버렸다.

▲ <라이안의 딸>

몇 년 전이었던가, <국립 영상원>에서 얼핏 스쳐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직도 난 그녀를 사랑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더욱 애절하기에, 그리움은 깊고 깊어져 심장 저편에 검은 멍이 들더니, 끝내는 가슴에 망부석(望婦石)으로 박혀 버렸다.

그렇게 검게 타 버린 상처를, 이젠 어두운 한(恨)맺힘으로 남겨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어 쓰다듬고 다독거리며 또 다른 ‘영화사랑’으로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연들을 저의 영화이야기에 담아서 제 나름의 마당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저의 영화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의 생활 속에 또 다른 재미를 안겨드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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