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너그러운 정권이 민주주의 정권
지역감정 넘어 대한민국이 화개장터 되길


나는 소위 ‘디지털 원시인’이다. 디지털문명에 대한 적응력이 다른 사람보다 다소 떨어진다.

▲ 김용국 정광고 교사.

전자결제를 할 줄도 모르고, 인터넷에서 롤플레잉게임도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도전의식이 떨어져선 지 디지털이란 낯선 세계에 발을 쉽게 들여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컴맹에겐 더욱 그렇다. 맹인에겐 세상 어느 길 하나 만만한 것은 없다. 클릭 하나 잘못하여 인생이 나락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디지털이란 대문을 과감하게 열고 나아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초딩 자식들은 내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게임도 몰래 다운받아 게임규칙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게임들을 섭렵하는 실정이지만 나 같은 원시인은 되지 말라는 은근한 바람도 있어 못 본 체 해줄 때가 많다.

나도 가끔은 용기를 내어 디지털 대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 영화를 다운 받거나,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사진을 편집한다거나(그나마 허접한 동영상 편집 기술은 까먹음.)

스마트폰을 통해 카톡도 하거나,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과 제자들의 현재적 삶의 단면을 훑기도 한다. 물론 아직 이모티콘 사용법도, 페이스북에 잘못 올린 사진 지우는 법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나는 디지털 시대의 구석기 원시인은 벗어나 신석기 원시인쯤은 되는 것 같다.

나는 주로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불통하면 꼬꼬님으로 오해 받을까봐. 페이스북은 내게 파생동사다. ‘페이스북하다’는 어느 새 자연스럽게 내 입말이 되었다. 내가 페이스북을 통해 소통한다는 것은 단지 지인과 제자들의 소식을 안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가끔 누군가 올려놓은 소식들을 통해 이 시대의 화두와 핫 이슈를 짐작할 수 있고, 특히 어리게만 보아 왔던 제자들의 사회 인식에 대한 높은 안목과 선악미추에 대한 그들 나름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내게 페이스북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 창을 들여다보면 페이스북이 충분히 민의를 수렴하는 ‘사이버 아고라’로써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한 초석이 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을 조심스레 진단해 본다.

하지만 이걸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이버 검열을 통해 정부를 비판하는 자들을 빨갱이와 종북세력이란 프레임에 가두고는 자유민주주의 운운하며 토끼 몰 듯 공안몰이를 자행하는 파시즘적 행태를 일삼는 자들이 그들이다. 자유를 말하면서 자유를 말살하는 행태는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짓인가? 어불성설은 이를 말함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를 어떤 이는 시장경제의 물신만을 숭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자유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이 아닌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말하는 종교, 언론, 출판, 집회, 탄원의 자유를 말한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이 자유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도 만들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 법조문에 탄성을 발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사회는 걸핏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세력들이 다양성과 다원성이 생명인 자유민주주의를 해치고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아닌가. 이들이야말로 칼 포퍼가 말한 열린사회의 적이 아닌가. 나아가 이들이야말로 인간의 이성과 존엄성에 대한 반역자가 아닌가.

정부가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욕먹는 것은 자고이래 당연지사다. 문제는 못하는 것까지 칭찬받으려 하거나, 아예 욕을 못하게 막는 독재자나 전제주의자들이다.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엔 경계가 없고 그 방법은 교묘하다.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장악한다.

쉽게 말하면 합법적으로 배당된 수를 그들 라인 법관들로 채우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마음 놓고 나쁜 짓 할 테니 당신들이 무죄 때려주거나 기각, 각하 시켜달라는 노골적인 정치보험이다. 한심한 것은 우리나라는 분명한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사법부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꼬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듯 사법부의 수반은 대법원장이라고 고교 시절 분명히 배웠음에도 행정부가 사법부의 상위 부처라도 되는 양 행세하고, 대법원장은 자존심도 없이 법위에 군림하려는 대통령에 대해 민주주의 파괴범으로서의 경고를 주기는 고사하고 굽실거리며 꼬리치기 일쑤니 나 같은 필부의 조소나 받는 것이다.

‘법대로!’를 외치며 법치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 득시글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무슨 권리로 법 위에 군림하려든단 말인가. 통진당 해산 판결에서 보았듯 사법부의 판결이 있기 전에 왜 먼저 대통령이 판결이나 진배없는 말을 흘려 판결에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이는 고의가 아니라면 분명 무지의 소치다.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을 존중한다지만 가부 판결 비율이 8 대 1이라면 민주주의의 생명인 다양성을 지키는 최후 보루로서 헌법재판소가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보기엔 힘들다.

물론 다수결 원칙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아니할 수 없으나 일반 국민들의 해산 찬성 비율 56%를 훨씬 상회하는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판결 비율을 보면서 단지 전문성의 차이에서 온 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행정부의 종 노릇이나 하는 사법부의 위상을 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초가 얼마나 취약한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좀먹는 집단으로 일베충으로 불리는 소위 ‘일베’회원들을 들 수 있다. 정권과 시류에 편승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난도질해대는 이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세월호 단식 유가족 앞에서 폭식 만행 퍼포먼스를 펼친 이들의 행위는 아무리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라지만 이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범죄에 다름 아니다. 상식이 무언가.

누군가 말했듯 지혜의 최상위 단계가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지식이라 일반성, 보편성을 획득한 지혜 말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 상식이듯 어른들의 탐욕으로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자식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 상식 아닌가. 제단에 나아가 꽃 한 송이 못 바칠망정 이 무슨 몰상식의 패륜 극치란 말인가.

더욱 가관인 건 일베가 사상검증까지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라도 인물들이나 단체에 대한 편집증적인 빨갱이 공세 집착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이들에게 국민들의 사상을 검증할 권한이라도 줬단 말인가? 헌법이 주었는가? 정부가 주었는가?

설령 정부가 주었더라도 정부가 이들에게 이런 권한을 주는 것은 어떤 법에 근거한단 말인가? 한 마디로 이런 권한은 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전라도인이나 전라도 관련 인물을 타깃 삼아 전가의 보도인 사상 검증을 하려 드는 것은 아마도 이들의 뒷배가 든든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전라도에서 태어난 허지웅 씨에 대한 공격도 맥을 같이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 제시장’에 대해 ‘토할 것 같다’는 허 씨의 평을 놓고 그렇다. 나는 허 씨의 평이 옳다 그르다 말할 능력도 없고, 또 말하고 싶지도 않다. 예술 분야에 대한 감상의 스펙트럼이 극히 다양하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굳이 허 씨의 평에 비평하고 싶다면 그 내용에 대한 것이어야지 거기에 왜 빨갱이, 종북이 낀단 말인가. 그리고 그 근거가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라니 그들은 논리결핍증후군이라도 앓고 있는 비읍시옷(ㅂㅅ)들이란 말인가?

전라도가 이제 무슨 천형의 땅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래서 한 기업은 전라도 사람 지원을 금지했단 말인가. 내가 전라도 장성 태생이라고 밝히는 것이 이젠 중요한 비밀을 밝히는 커밍아웃이라도 된단 말인가? 새삼 지역감정 바이러스 유포자들과 일베에 대한 분노가 인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여 법치국가에 사는 고로 이들에게 폭력이나 테러를 구사할 수는 없으니 대신 나의 제자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들이 나고 자란 터전인 고향을 자랑스러워 해주길 빌어본다.

그래서 타 지역에서도 당당하게 고향을 밝히고 더욱 멋지고 즐겁게 청춘의 자유를 구가하며 살길 바란다. 이렇게 사는 것이 차별 없는 헌법정신에 부합한 삶이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지키는 길이고, 얼치기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든든한 뒷배만 믿고 이들 얼치기 몇 명이 백주대낮에 설친다고 대다수 국민들의 염원인 민주주의가 실종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어떤 시인처럼 남몰래 신새벽에 민주주의라고 써보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아직도 민주주의의 암초들이 수면 위아래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정권을 비판하는 자들은 언론과 방송에서 퇴출되고 있다.

1950년대 일었던 미국의 매카시즘의 유령이 아직도 대한민국 언론방송계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매카시즘은 50만 명이나 공산주의자로 조작하여 몰아가며 기승을 부렸다. 내가 좋아하는 미남배우로서 영국인이 한 때 가장 위대한 소설로 선정했던「앵무새 죽이기」의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도 이때 이 마녀사냥의 제물이 될 뻔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미국 국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인생을 거덜 내 벌벌 떨게 했던 매카시즘도 결국 막을 내렸다.

이는 방송인 존 헨리 폴크와 변호사 루이스 나이저의 끈질긴 6년의 법정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미국 국민은 독립선언서의 전부라 할 자유와 존엄성을 상실한 채 아직도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살고 있지나 않을까.

나는 민주주의 정권이라면 정권의 비판에 너그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에 너그러울 때 이는 소통의 한 수단이 되고 역설적으로는 민주주의는 더욱 공고해지고 더욱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프란체스코처럼 상처받은 자들을 껴안아 줘야 한다. 지역감정으로 피멍든 사람들을 보듬어 주어야 한다.

보듬어 주란 것이 너무 큰 요구라면 최소한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자들을 법으로 엄단해야 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화개장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디지털 원시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디지털 세상에서 바라본 한 민주시민으로서의 단상이다. 생각마저 원시인이 될 수는 없잖은가. 데모크라시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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