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숙지원에 첫서리가 내렸다.

쌀쌀한 바깥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금세 첫서리가 내렸으리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완두콩을 심던 아내는 손과 발이 시리다고 했다.

아침 기온은 섭씨 3.5도였다.
고개를 돌리니 이웃집 지붕위에 하얗게 내린 서리가 보인다.

첫서리는 첫사랑이나 첫눈처럼 아련한 그리움과 달콤한 사탕 같은 정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 잔디밭을 하얗게 덮은 서리. 이 사진은 18일 아침 모습이다. ⓒ홍광석

오히려 기다리지 않았던 서먹한 이웃을 만난 듯한 느낌, 한 계절이 끝났다는 아쉬움,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듯한 경계심과 함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예년에 비해 금년 첫서리가 빠른 것 같아 인터넷에서 남부 지역의 서리 내리는 시기는 11월 초순에서 중순이라고 한다.

숙지원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광주에 비해 계절의 변화는 1주일 정도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금년의 첫 서리는 지형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점이 있다.

이곳 남도는 요즘 벼 수확이 한창이다. 예전처럼 품앗이도 없고 낫을 들고 베는 정겨운 모습도 볼 수 없지만 황금물결의 논과 길가에 널어둔 홯금색 벼를 보면 속이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쌀 수입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이런 농촌의 풍경도 얼마나 볼 수 있을는지. 정부 말로는 관세를 높여 국내 쌀 농가를 보호하겠다고 하지만 농민들은 UR협상, WTO 가입, FTA 협상과정에서 농촌의 이익보다 농촌 죽이기에 앞장선 정부를 보았기 때문인지 믿지 않는 분위기다.

텃밭을 돌아본다. 벌써 마늘은 한 뼘이나 자랐다. 엊그제 씨앗을 넣은 완두콩 싹은 기다려야할 것 같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데 비 온 후에는 양파를 심어야 할 것이다. 고구마 야콘 생강 캐는 일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서두르지 않아도 끝날 것이다.

농약 없이 키운 텃밭의 무 배추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자라고 있다. 당근이 좀 늦된 것 같이 보이지만 쪽파는 이미 뽑아 먹을 정도로 자랐다. 서리에도 꿋꿋한 모습들이 장하다. 우리 가족에게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꽃동네는 심각하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던 달리아 신비스런 뻐꾹나리, 대문에서 마당으로 들어오는 길을 밝혔던 노란 멜란포디움이 선명함을 잃었다.

백일홍은 잿빛에 가깝고 희색과 붉은 색 천일홍도 기가 빠진 모습이다. 보랏빛 층꽃, 노란 에키네시아, 하얀 담배꽃은 지친 듯 서로 기대고 있다.

키 작은 추명국도 떨고 있다. 거친 땅에서 아주 작은 생명으로 태어나 보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고 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던 꽃들.

▲ 벽돌색 지붕에도 서리가 하얗다. 18일 아침. ⓒ홍광석

모진 비바람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람들에게 기다림과 희망을 가르쳐주던 꽃들. 신비스런 모양과 색과 향기로 지닌 꽃들은 소리 없는 평화였다.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었다. 그 꽃들이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첫서리! 어쩌면 살아있는 생명의 나이를 키우는 또 다른 변주(變奏)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기상이변으로 인해 소리 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재앙의 서곡은 아닌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 곁의 가까이 다가와 보고 들을 수 있는 자연의 경고는 아닌지.

그런 걱정을 한다. 가을비가 내린다. 차분하게 되돌릴 수는 없지만 깨끗한 기억을 반추하기에 딱 맞는 시간이다. 하지만 빠른 첫서리에 이은 휴전선의 소식도 담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네는 전쟁을 기다리는 것일까?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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