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의 벗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했다.

김근수 신학자의 전언에 의하면 프란치스코 교종은 노동자의 벗 레오13세, 휴일이나 밤에 몰래 바티칸을 빠져나와 로마 거리를 돌아 다녔다고 해서 조니 워커의 애칭이 붙여진 요한23세에 이어 로마 교황사의 세 번째 개혁교황이라 한다.

때문에 강우일 주교(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의 말씀을 빌려 권위적인 교황보다는 '탈권위적인 교종'이라 칭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민중의소리 갈무리

프란치스코 교종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축복과 슬픈 대한민국을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축복이 어우러지는 오늘만큼은 한반도가 지구에서 가장 축복 받은 땅이 될 것이다. 모든 분들의 축복에 동참하며, 온 마음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을 환영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 첫 일성은 “평화와 치유”였다. 두 단어에 함축된 의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평화는 우리 민족 문제의 근원이며 해법인 남북분단이며, 치유는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국가적 참사에 대한 슬픈 대한민국을 정확하게 진단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이해하고 왔는지에 대한 가늠자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규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대표적인 말씀 중 하나다. 이는 끝없는 탐욕으로 상대적 약자를 무참히 짓밟는 강자독식,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지향하는 규제 받지 않는 자본권력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프란치스코 교종을 환영하는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자 또한 규제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녀는 “규제는 쳐부술 원수이자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라고 했다. 세계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칭송하는 프란치스코 교종과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그녀는 “부자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비바 파파 세월호”의 함성을 듣고 싶다.
가톨릭 교종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비바 파파(교종 만세)”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30년 전 1984년 교종 요한바오로2세가 방한했을 때 그를 환영하는 인파들에 의해 대한민국에 울려 퍼진 함성이었다.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교종이 모두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대한민국에 마침표는 없고, 물음표만 있다.”는 무능한 정권을 질타하는 웃지 못할 유행어가 들린다.

교종의 방한 일정 중 치유와 관련한 부분을 살펴보자. 방한 기간에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유족,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기다리며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아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용산참사 유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제주 해군기지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하는 강정마을과 밀양 주민들을 만날 예정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해결된 사건은 없고, 국민적 의혹만 증폭되고 있다. 그래서 “마침표는 없고, 물음표만 있다.”는 풍자가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이중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는 으뜸 “세월호 참사”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친다. “대한민국은 2014년 4월 16일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는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국민적 외침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 외침의 결정체가 “진실규명”이며, 대다수 국민이 요구하고 있는 해법이 “수사권과 기소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부여당을 상대로 국민적 요구에 대답해야 할 대한민국의 야당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회자되는 또 하나의 풍자어가 “국민이 야당이다.”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영역은 시민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시민의 참여라고 한다. 정치는 국민의 요구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답하지 않거나 바람직한 대답이 아니라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산지사방 모든 곳에서 세월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행동의 일환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하는 일정의 모든 지역에서 “비바 파파 세월호”를 연호했으면 하는 것이다. “비바 파파”는 교종을 환영하는 찬사이며, “세월호”는 정치적 사안이 아닌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이 아닌 우리의 아픔이기에 스스로 치유해야 하는 절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기댈 것은 희망입니다.” 1940년 찰리채플린의 일성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망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진짜 희망은 우리의 참여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평화”의 메시지로 분단을 해결할 수 없듯이 “치유”의 메시지로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진실규명을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의 쟁취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 길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동행하기를 바란다.

비바 파파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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