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국 칼럼] 4.16 참사, 그 일상성의 두려움
[김용국 칼럼] 4.16 참사, 그 일상성의 두려움
  • 김용국 <정광고> 교사
  • 승인 2014.06.03 2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 세월호 사고를 ‘참사(慘事)’라 규정짓겠다. ‘참사’의 사전적 의미는 ‘끔찍한 사건’을 의미한다.

하여 나는 세월호 사고를 ‘4.16 참사’라 명명하겠다. 세월호 사고는 세월호 한 회사의 무책임만이 아니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어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때같은 어린 넋들을 그대로 바다 속에 수장시킨 이 나라 공권력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줬기에 말이다. 이럼에도 국가는 책임을 선사와 선주의 책임으로만 돌리려 획책하는 꼴은 목불인견에 가깝다.

어린 넋들이 어른들 앞에서 바다 속에 영면하고 말았다. 죽는 순간 자신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애타게 가족,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다 죽어간 꽃다운 넋들. 대한민국 국민 뉘 있어 수백의 어린 꽃넋들 숨져간 그날의 비극, ‘4.16 참사’를 쉬 잊을 수 있을까.

▲ ⓒ민중의소리 갈무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던가. 한국민은 냄비 근성의 소유자들이라던가. 이들도 곧 우리의 일상성에 함몰된 채, 연중행사처럼 편린으로 기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머잖아 4.16 참사는 ‘그저 그런 날’이 되고 말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것이 두렵다.

4.16 참사가 일상성에 편입될 때 참사는 우리 안에서 평범한, 범속한 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도처에서 나타는 각종 참사들은 우리를 마취시키고, 그것의 경각심을 제거해 버린다.

결국 이렇게 참사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벌써 그런 기미가 보인다. 도곡역 화재, 장성 요양병원 화재에 희생된 이들의 수가 적지 않건만 4.16 참사에 비해 그 충격은 훨씬 미미하다. 우리는 벌써 4.16 참사로 인해 참극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내성으로 인해 사상자의 수만을 물을 뿐 여타의 참사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들춰냈다. 유대인 학살 명령에 따라 그것을 집행한 아이히만.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된 아이히만은 교수대 앞에서도 받으며 자신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고,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면 되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며 신념어린 어조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 중 하나로 ‘무사유’를 꼽았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유 없이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수많은 목숨을 기계적으로 앗은 것이라 지적했다.

‘4.16 참사’의 주범 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한 우리 교단의 순치교육이다.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력 신장을 내세우는 일선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이 내세우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은 불복종 내지 반항으로 규정되어 당국으로부터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하물며 아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학생회 등 자치기구는 유명무실해 학생들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의견은 묵살되기 일쑤이고, 체육대회 종목 하나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따라 하는 학생들.

자신의 머리나 복장 하나 개성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시킨 대로 따르게만 하는 교육. 체육시간 이외에 체육복 좀 입었다고 혼내는 교육. 교장실 앞을 지나는 학생을 혼내는 교육.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본령이 아닐진대 아직도 인권이 묵살된 순치교육이 일상적으로 교단의 망령처럼 횡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일상성이 두렵다. 일상성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사고의 고착화를 부른다. 이런 교육적 풍토가 우리 교단의 일상성으로 자리할 때 대한민국의 희망은 설 자리를 잃을 게 뻔하다. 교사들의 각성이 없는 한 아이들의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 신장은 요원할 뿐이고, 그저 영원한 희망사항으로 전락하고 말리라.

‘4.16 참사’는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이 선실 안에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어라’란 명령의 권위에 비판적 사고력 작동이 중단된 채 열탕 속 개구리처럼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속에서도 말 그대로 가만히 있었던 아이들.

누구 하나라도 순치교육의 틀을 깨고, 무사유의 창을 깨고 “가만히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우리 나가자.”란 말만 작게라도 했어도 적어도 수십 명의 어린 넋들은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욱 서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고3 담임 2년째다. 되돌아보면 딱히 나도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입시 성적 향상이란 미명하에 인권은 묵살된 채 순치교육의 제단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위해 일떠서지도 못했다.

▲ 김용국 정광고 교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못 본 척했을 뿐이다. 이런 생활이 이제 나의 일상이 된 듯하다. 무섭다. 일상성에 함몰된 채 말로만 인권,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만을 강조하는 허접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는 나.

동서양의 명철들은 지행합일을 강조했다. 앎은 실천이 없으면 공허하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이를 위해 명철들은 일찍이 의지력을 강조했다. 앎의 실천에 필수적인 요소가 의지력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내겐 이 의지력이 결핍되어 있음을 통렬히 자각한다. 부끄럽다. 하지만 조심스레 희망해본다. 부조리한 순치교육의 일상성을 깨기 위해 내 안의 아이히만, 교단의 아이히만들을 몰아내기 위한 실천력을 겸비하길.

나아가 이것이 나의 일상성으로 승화되길. 이리 될 때 제2, 제3의 ‘4.16 참사’는 대한민국에서 종언을 고하리라 믿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