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여행길에 참변을 당한 학생들과 승객, 유족들에게 온 마음을 바쳐 위로를 드립니다. 모두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다시 돌아왔다. 기억하면 끔찍하지만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4.19. 역사는 왜 이리도 잔인한가. 역사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잔인하다. 4.19를 되돌아보는 늙은 기억 속에 옆에서 쓰러져 간 젊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평범한 청년에게 무슨 정치적인 철저한 신념이 있으랴. 그냥 부정선거와 독재는 나쁘다는 상식적 저항이었다. 계기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명동 음악실에서 음악에 묻혀 있던 귀에 들리는 소리. “대학생이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1960년 4월19일이다. 그 전날 4월18일, 국회 앞에서 시위하던 고대생들이 귀교길에 종로5가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부하에게 자전거 사슬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고함소리에 밖으로 뛰어나온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프 지붕에 실린 시체, 피가 철철 흘렀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실에 있던 젊은 친구들이 튀어 나왔다. 거의 대학생들이다. 을지로 입구에 치안국이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의 물결로 길이 넘쳐흘렀다

인파에 휩쓸렸다. 자신의 신분도 잊었다. 그 때 나는 휴가중인 현역군인이었다. 데모를 하다가 잡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 성난 학생들이 강제로 징발한 버스와 트럭에 몸을 싣고 구호를 외쳤다. ‘독재타도’ ‘이승만 물러가라’

트럭은 시내를 달렸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마구 달렸다. 누군가 경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지금의 조선호텔 앞 서울특무대 본부, 동대문 경찰서, 성북경찰서, 을지로 치안국 앞, 서울시내에 도처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사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거리에는 총 맞은 시민이 뒹굴고 언제 나타났는지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시체를 나르고 있었다. 트럭에서 내렸다. 누군가 팔을 잡는다. 친구다. 둘은 팔을 끼고 구호를 외치며 뛰었다. 서대문경무대라는 이기붕의 집(4.19도서관)앞에서 친구가 갑자기 주저앉는다. 아니 이럴 수가. 친구가 총을 맞았다. 병원으로 실려 갔다. 따라가지도 못했다. 비겁한 놈. 군인신분이 탄로 날까 겁나서다. 다음 날 친구는 죽었다.

자유당정권의 애완견이던 서울신문과 반공회관이 불탔다. 동대문 경찰서 성북경찰서가 불탔다. 지금도 문화일보 앞을 지나면 총을 맞고 주저앉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그렇게 4.19를 겪었다.

4.19는 국민에게 무엇인가.

독재는 나쁘고 부정선거는 나쁘고 항의 시위하는 국민에게 총질을 해 죽이는 것은 더욱 나쁘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는 고위공직자는 더 더욱 나쁘다. 독재와 무정선거의 종말은 비극이었다. 독재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객사했고 이기붕은 아들의 손에 일가족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

총은 쏘라고 주었다던 내무장관 최인기, 경무대 경호실장 곽영주, 정치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던 정치폭력배 이정재 임화수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가 아니라도 독재의 끝은 늘 비극이었다. 박정희를 보면 된다.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독재자의 말로는 참혹했다. 카다피는 하수구에서 총 맞아 죽었고 후세인은 구덩이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죽었다.

4.19 그날. 쏘라고 준 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수송초등학교 6학년 전한승 군과 금호초등학교 정태석 군도 사망했다. 한성여중 2학년이던 진영숙은 집에 유서를 써놓고 시위에 나섰다.

‘어머니. 학교 친구들이 모두 데모에 참가했어요.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찾아야 합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진영숙은 경찰 총에 숨졌다. 수송초등학교 6학년이던 김명회는 시를 썼다.

[나는 알아요.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1960년 4월19일. 이 땅을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인 4.19 민주혁명. 지금 5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왜 우리는 다시 4.19를 생각하는가. 선거부정이 있었는가. 독재국가가 되었는가. 그 때의 영령들이 잠든 수유리 4.19 민주묘역은 말이 없고 국민의 가슴은 몹시 아프다.

입으로는 언제나 국민이 주인이었다.

주인공은 항상 국민이었다. 좋은 놈이나 나쁜 놈이나 제일 먼저 앞세우는 것은 ‘국민’이란 두 글자였다. 민주정부를 뒤엎은 군사쿠데타에도 ‘국민’은 선두였다.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도 ‘국민’은 선두였다. 항상 맨 앞에 내세워진 채 만신창이가 된 ‘국민’들. 그런 국민들이 스스로를 위해 궐기한 것이 4.19혁명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댓글을 쏟아 낸 국정원 댓글부대도 국민을 위한다고 했다.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빨갱이 세상이 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야당 대통령이 되면 빨갱이 세상이 되는가. 유우성을 간첩으로 조작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적화되는가. 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국정원장이 사과를 하고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사과를 했다. 사과의 퍼레이드다.

사과는 약속이다.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공개적 약속이다. 사과는 진정으로 해야 한다. 가짜 약속은 백번을 해도 소용이 없다. 왜 가짜 약속이라고 하는가. 지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해 보라. 그 많은 약속 중에서 지킨 약속이 얼마나 되는가. 약속은 기차의 가짜승차권 같은 것이다. 볼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아니다. 오죽하면 조중동과 문화일보까지도 남재준 사퇴를 요구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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