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소설에서 나온 지명, 샹그릴라는 중국의 히말라야 동편 어딘가에 있는 이상향이라고 했던가!

살기 좋은 자연환경, 욕심도 다툼도 없는 사람들이 어울려 평화롭게 사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염원은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원초적인 꿈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무릉도원, 미륵정토, 낙원,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등 이름을 달리한 이상향을 설정하고 찾고자 하는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상향을 그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것들의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샹그릴라 혹은 무릉도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오락성 짙은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여유 있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 고 이남종 열사.

그런 국가적인 관광 사업은 외형적인 면에서 비교적 성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샹그릴라 혹은 무릉도원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 기저를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찾은 사람들의 이면에는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전제로 이상향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현실 세계에 대한 도피, 그러면서도 병들지 않고 오래 살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의 표현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상향을 찾는 개인의 심리는 반드시 이기적인 욕망이라기보다, 기댈 곳 없는 정치 사회적인 불안과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대심리 혹은 희망과 기원을 담은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광주인

많은 학자들이 개인의 문제가 주변의 정치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특히 정치는 인간 사회의 상위제도로 사회구성원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제도보다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정치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개인의 노동과 능력을 착취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정치가 반 인간적 반 인권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현실 세계에 대한 개인의 불만과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런 불만의 표출구로서 또 자기 위안의 수단으로서 이상향을 동경하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제 무릉도원이니 샹그릴라 등 동서양의 이상향도 들여다보면 현실 정치의 도피 의식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성공과 실패에 따라 개인의 사고와 삶에도 크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개인이 갖는 꿈과 희망도 정치적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꿈과 희망의 한 부분으로 이상향을 설정하고 아울러 비슷한 심정의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사회적인 화두처럼 자리 잡은 것 아니냐는 분석을 해본다.

최근 한 젊은이가 불쑥 던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반응이 뜨거웠다. 불안한 정치 환경의 산물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 그 불안한 정치 환경에 대한 공감의 표시로 많은 사람들이 대자보에 답을 했을 것이다.

▲ 4일 오후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고 이남종 열사 노제에 나온 광주시민들. ⓒ광주인

거기에 답하지 못한 사람들도 한 번 즘 자신이 과연 안녕한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생활의 어려움, 극히 편향적인 언론의 횡포에 의한 집단 죄의식의 마비, 국정원과 군대 그리고 검찰들 국가 기관의 권력 남용으로 인한 사회정의의 상처 등을 보면서 비록 흩어져 있는 개인들이지만 공감하고 자각하면서 나아가 반성과 각오의 의미도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살벌하고 쓸쓸하다.

정치한다고 이름을 내 놓은 그네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거짓말 경쟁이나 한다. 법과 원칙은 국민을 협박하는 권력자의 전유물이 되었고 사회 정의는 독재를 미화하는 장식품이 되었다.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사납고 탐욕으로 인한 정치인들의 아귀다툼이 눈물겹다. 그런 정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경제적 평등은 심연에 가라앉아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건질 수 없는 난파선이 되었다.

일하고 싶은 젊은이들, 결혼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나라. 상시적인 북한 도발의 위협에 노출된 서민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드러내놓고 절망을 이야기하면 유언비어가 되어버리는 나라.

아파도 참고 슬프고 괴로워도 웃으면서 가난은 내 탓이요 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인내와 침묵이 미덕이 되는 나라가 되었다.

신세한탄조차 가로막힌 이런 나라에서 안녕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 부도덕하고 절망적인 나라에서 한 젊은이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은 너무나 당연한 자기 성찰이요, 어쩌면 1년을 참은 끝에 나온 비명이었는지 모른다.

2014년 벽두에 한 젊은이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전부터 이러다가 누군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말이 씨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난하고 힘없는 젊은이가 죽다니! 갑오년 새해를 맞이하는 설까지 선한 생각과 좋은 말만 하며 살고자 했던 다짐이 순식간에 박살나고 말았다.

▲ ⓒ광주인

▲ ⓒ광주인

개인이 안녕할 수 없도록 만든 못된 정치에 내몰린 죽음.
아무리 외쳐도 진실이 통하지 않는 불통 정치의 덫에 걸린 죽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괴물의 자식들이 불을 붙인 죽음.

분신은 국민이 편안한 나라, 정치가 안정된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강열한 저항이다. 그런데 젊은이의 고뇌에 찬 죽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진 결단을 왜곡 폄훼하는 사이비 언론들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우상을 받드는 지역주의자들, 낡은 이념의 허수아비들, 군사 반란을 미화하는 자들, 불통을 미덕으로 여기는 내시들, 떡값에 놀아나는 권력의 개들이 단결하여 다수 백성들을 옭죄고 있는 정치 현실을 보고 있으면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딘가 숨고 싶지만 이 땅 어디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안녕”할 곳은 없어 보이고 포악한 정치를 피해 숨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고 알려진 무릉도원 가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인류가 오랫동안 무릉도원 파라다이스 미륵세상을 찾았으며 지금도 샹그릴라로 가는 길을 묻는지 이해할 것 같다.

절망은 희망의 씨앗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반성 없이 희망은 오지 않는다. 분명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물음은 불법과 부정과 파렴치와 침묵을 깨는 파열음은 맞지만, 아직 회한의 회개와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안녕을 외면하고 젊은이의 죽음을 왜곡하는 인간들에게 회개와 반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만 같다. 아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 답답하다.

젊은이들이여, 제발 죽지는 마라!
살아서 싸우라!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

잠시 무릉도원을 찾아 현실을 피하고 싶다.
정녕 꿈이리라.
안타깝다.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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