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꺼지면 민주주의도 꺼진다

국정원의 국정조사가 참담하게 끝난 후 처음 맞는 주말, 광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무거웠다. 바위에 부딪쳐 무참하게 깨진 달걀꼴이 된 국정조사. 전직 국정원장은 당당하게 국회국정조사의 증인 선서를 거부한다. 경찰청장을 지냈다는 자가 증인선서를 못하겠단다. 그 꼴을 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야당. 국정조사는 국민 가슴에 왕 대못을 박기 위해 하는 것인가. 국정조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역시 국민의 혼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고마움이다. 광장이 꽉 차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울화가 치미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만 촛불을 보면서 몹시 화가 날 것이다. 그들이 확신하는 이른바 ‘종북세력’의 끈질긴 생명력에 치를 떠는 세력이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철부지과대망상 중증환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석기의 ‘내란음모’ 발표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을 벌컥 뒤집어 놓은 지난 8월 마지막 토요일. 서울역 광장에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 2만의 시민이 모였다. 결론은 이석기과 촛불은 아무 상관이 없고 종북과도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머리가 혼란스럽기는 피차 마찬가지리라. 광장촛불을 보는 두 개의 시각, 누가 옳고 그른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라가 이렇게 찢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얼굴에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볼을 타고 흐르는 또 다른 물줄기를 닦아내는 손길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촛불이 ‘종북’이냐

이석기의 ‘내란음모’ 사건은 국회가 압도적으로 가결 처리했다.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제명을 한다는 보도도 있다. ‘내란음모’를 꾸미는 자와 어찌 자리를 함께 해 국사를 논할 수 있느냐고 할 것이다.

한다면 하는 새누리다. 못할 것도 없다. 편들어 주는 식구가 얼마나 많은가. 조중동을 비롯해서 민주당 까지 거들어 준다, 새누리는 자신할 것이다. 그다음은 또 무엇인가.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도 예고편이 있다. 불을 피울 때도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불쏘시개에 불을 댕기는 징조가 보인다. 당 대변인이라는 홍지만이 문재인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고 김태흠이란 의원은 용감무쌍하게 국회해산까지 거론한다. 심재철 정우택도 빠지면 큰일 난다는 듯이 끼어든다. 인간의 머리는 무한한 저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머릿속에 상식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모양이다. 몰상식의 공간만이 존재하는가.

오래 살면 손자녀석 늙어 죽는 거 본다더니 문재인에게 이석기 문제를 책임지라는 걸 보면 꼭 그 짝이다. 그러나 잘 드려다 보면 이건 억지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재인의 발을 묶어놓는 효과가 있다. 또 한 가지는 세 사람이 떠들면 장터에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국민들중에 진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새누리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깜이 없다는 것이다. 김무성, 홍준표, 김문수 등이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들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자신들이 잘 안다. 턱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들에게 안철수는 안중에도 없다. 크게 보이고 무섭게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문재인 뿐이다. 새누리 눈에도 제대로 보이는 것은 있는 것이다.

아직 4년 반이나 남았는데도 저렇게 안달을 하는 것을 보면 다급하면 무슨 짓이든지 한다는 예고와 같다. 가랑비에 옷 젖고 잔매에 골병든다고 한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불쏘시개를 태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태산이다. 촛불이다. 촛불에는 대책이 없다. 그래도 가야한다. 문재인을 잡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일 것이다.

촛불이 꺼지면 민주주의도 꺼진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국민 모두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고 국정원을 개혁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도 영원히 안녕이라는 위기의식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끄떡도 않는다. 박대통령은 알아서 하라는 셀프개혁 주문이다. 지금 국정원이 셀프개혁 할 것 같은가.

국정조사는 개판으로 끝나고 국민들은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거기에다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 이석기다. 이석기는 정리됐다. 이제 야당과 국민이 해야 될 일은 국정원 개혁이다. 국정원 개혁은 가능한가. 샐프개혁은 무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심만 한다면 항 방에 된다. 그러나 그 역시 난망이다. 남은 것은 촛불을 든 국민의 몫이다.

민주당은 큰 소리 땅땅 쳤다. 4일 서울광장에서 ‘국정원개혁 결의대회’를 했다. 김한길은 국정원 개혁을 치열하게 전개하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당 대표는 필요 없다고 했다. 노숙은 괜히 하는 것이 아니고 국정원 개혁이 없으면 노숙은 중단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믿고 싶다. 믿어야 한다. 국민 모두가 다 함께 민주당을 믿고 김한길 당대표를 믿고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민주당 지도부에 대해 돌아다니는 유언비어를 물리쳐야 한다. 그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더한층 치열하게 촛불을 밝혀야 한다. 촛불이 꺼지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민주당은 할 수 있다. 127명의 의원이다. 국회선진화 법은 야당과 함께 국사를 의논하라는 법이다. 다수당이라도 독선은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국정원 개혁과 특검 없이는 새누리와 국정을 논의하기가 힘들 것이다. 국민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절대로 국정원 개혁을 못한다는 괴소문을 민주당이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국정원 개혁이다. 그 결과는 놀라울 것이다. 바로 신뢰회복이다. 차마 말 하고 싶지 않은 소문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소문들, 그런 소문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존경받는 원로 어른들

집안에도 어른들이 계셔야 질서가 유지된다. 어른이란 분들이 팔짱 끼고 앉아서 큰기침만 한다고 제대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이 일 저 일 모든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할 말을 해야 할 때 따끔하게 한 말씀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9월3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원로어른들이 한 말씀 하셨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로들의 말씀은 분명하다.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 는 것이다. 원로들의 모임에는 존경받는 원로 여든 두 분이 모였다. 한승헌 변호사, 백낙청 교수, 함세웅 신부, 청화스님을 비롯한 원로분들의 답답한 심정을 최영도 변호사가 마무리 말씀으로 정리했다.

“오늘은 불행한 날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날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감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어린 손자들과 놀아야 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나라가 걱정되어서 모였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모였습니다.
정치인들이 잘했으면 우리는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회견문에서 밝혔듯이 네 가지 사항을 제언합니다.

첫째, 소통의 정치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귀를 열고 국민, 여야, 언론의 소리를 듣고 열린 정치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국정원을 개혁하라는 것입니다.
국정원이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대대적으로 개혁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대통령은 선거공약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대선 핵심 공약인 경제민주화, 복지정책 확대를 후퇴시키면 그 분은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넷째,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정부와 여야가 합심하여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안 하면 우리가 하겠습니다. 주권자인 우리 국민이 할 것입니다. <우리는 1987년 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살려낸 경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희생이 수반될 것입니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종의 수비수는 국민이니까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잘해서 우리 시민사회원로들이 다시는 모이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 모임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 9. 3.

어른들 말씀 들어서 손해나는 것 없다.


이기명(팩트TV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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