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혹은 풍경 4

지난 겨울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말썽이었다. 겨울에 눈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에서 차바퀴가 빠지는 진창길로 변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불편하여 임시방편으로 모래라도 깔자고 모래 한 차를 부른 것이 직접적인 화근이었다.

모래를 싣고 온 트럭이 아예 진흙 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겨우 마을 이장님의 트랙터를 동원하여 트럭을 구했으나 맷돌을 깔아 만든 진입로는 문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흙에 박힌 맷돌을 찾아내 사람 다니는 길은 정리했지만 승용차가 다니는 길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설을 쇠고 우선 차가 빠지지 않는 찻길만이라도 만들자고 틈틈이 마을을 돌며 돌을 모으고 언 땅을 파고 돌을 심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길을 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우선 로마의 길에 놓인 돌처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한 규격의 돌을 자연 상태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크기와 모양에 상관없이 한 면이 평평한 돌을 찾아 나섰지만 그런 돌도 아무 곳에서나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하나 둘씩 한 면이 평평한 돌을 주워 모으고 수레에 실어 나르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줄을 띄워 돌을 깔 자리의 흙을 파내기, 다시 돌의 모양과 두께를 가늠하여 퍼즐게임을 하듯 끼워 맞추어 돌을 까는 작업은 진도도 더딜 뿐 아니라 돌의 무게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쉬엄쉬엄 일을 하다 보니 설을 쇠고 시작한 일은 지금까지도 폭 0.8m 길이 15m의 길이 겨우 만들어졌을 뿐 아직도 돌길 만들기는 진행형이다.

원하는 돌마저 구하기 어려워 양쪽 차바퀴가 다시는 진창에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완성하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기약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렇게 돌길을 만드는 와중에서 하우스에 씨고구마 넣기, 야콘 모종 만들기, 밭을 뒤집어 이랑을 만들고 두둑치기를 했고, 본격적인 농사 준비인 멀칭작업을 마쳤다.


이미 감자와 생강은 심었는데 곧 고추와 각종 모종을 심을 작정이다. 아무리 세상이 불안하다지만 그리고 텃밭 농사라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농사는 눈짓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정성을 모은 기원도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최대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농사이다.

그렇다고 바쁠 것은 없다. 쉬엄쉬엄 거름을 뿌리고 밭을 뒤집는다. 자신의 과거는 회상할 수 있지만 다가올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신에 의지하고 조상님들의 음덕을 기대하는 사람도 많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인문환경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더구나 언제 흉기로 돌변할 줄 모르는 문명의 이기 등 워낙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신에게 기도한다고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며 정성을 다해 조상님 차례 상을 차린다고 모든 사람이 조상의 덕으로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농사역시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수확까지의 과정에서 폭우 가뭄 강풍 병충해 등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이변이 있고 또 수확 후에도 적정한 가격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팥 난다는 사실을 알고 정직하게 씨앗을 뿌린다면, 또 싹이 트고 열매가 맺는다는 자연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면 농사는 비교적 예측 가능한 일이다.

금년 농사 역시 자급자족을 목표로 다품종 소량생산을 시도할 계획이다. 특히 기본적인 양념거리인 마늘 고추에 이어 금년에는 참깨의 자급에 도전할 작정이다.

사실 먹거리의 불안은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수준이다. 지구촌 곳곳에 이상 기후로 인해 농작물의 생산량이 줄고 가격은 오른다는 소식이 들린다. 최근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인구 증가와 소득의 증가, 그리고 식생활 패턴의 서구화로 인해 ‘세계 식량의 불랙홀로 등장’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았다.

촌노인이 봐도 중국의 변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안이하게 방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웃나라 중국의 변화는 직접 우리 밥상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필요한 농산물이라도 자급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이익이고 국가적으로도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요즘 아내는 수십 종의 꽃씨를 뿌리고 꽃모종을 옮기는 일을 한다. 봄에는 크로커스 수선화 할미꽃에서 시작하여 여러 종류의 철쭉이 화려하고, 금사매 장미 꽃양귀비 샤스타데이지 끈끈이대나물 아이리스 패랭이꽃 비올라 노란 낮달맞이꽃 분홍낮달맞이 금잔화 꽃잔디…, 거기에 매화 자두 사과 산수유 배꽃까지 더해 숙지원을 환하게 할 것이다.

여름에는 접시꽃 다알리아 분꽃 백일홍 봉숭아 담배꽃 해바라기 누드베키아 매발톱 도라지꽃 파라솔 천사의 나팔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이 지치지 않고 꽃밭을 메울 것이다.

7월부터 나락이 익을 때까지 피는 배롱나무의 분홍 꽃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꽃무릇과 상사화가 피고 아기범부채, 국화가 지고나면 다시 눈이 내릴 것이다. 아내는 그런 미래가 오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어가고 있다.

숙지원은 산골마을이라 광주에 비해서도 일주일쯤 늦다. 이제 매화와 수선화는 저물고 자두나무에도 꽃이 진 자리에 새 순이 돋는다. 잔디밭은 날마다 푸르러지고 원색의 튤립이 화려하다.

막 철쭉들이 부어터질 것처럼 시간을 재고 있다. 그 철쭉이 피었다가 지면 이내 여름이 올 것이다. 여름이 오면 마늘 양파 완두콩을 수확하고 고구마를 놓을 것이다.

그 때쯤 자두나무에는 붉은 열매가 익어갈 것이다. 거기에 아내가 뿌린 꽃씨들이 아름다운 꽃의 자태를 자랑할 것이다.

남북의 긴장관계는 갈등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것 같다. 정치는 갈팡질팡 서민의 삶도 팍팍한 탓인지 서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며칠 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한 현실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불안도 농작물이 자라는 데는 방해가 되지 못할 것이다.

헛된 욕심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위로하면서 예측 가능한 나만의 작은 미래를 만들고 싶다면 작은 정원 혹은 텃밭을 가꾸는 일도 괜찮지 않을까?

2013.4.23.

봄비 내리는 날에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