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생각해보니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영화 연구를 업(業)삼아 사는지라 일반인들보다는 자주 극장을 찾고 있긴 하지만, 동네 비디오 가게의 DVD나 각종 채널에서 개봉한지 불과 몇 달 되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 1950-60년대 광주극장 전경 © 향토사학자 박선홍 제공  
꼭 보고 싶은 영화는 급하게나마 유료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을 받아 보기도 한다. 극장에 쉬이 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곳이 이제 내게 ‘쉼’의 공간이 되지 못하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티켓 부스와 고가(?)의 팝콘과 음료, 그리고 완성도가 의심되는 ‘때깔만 좋게’ 스펙터클로 무장한 작품이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 썩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 쇼핑몰이면 으레 들어서있는 멀티플렉스는 원스톱(one-stop)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그러한 까닭에 더욱 감상의 여운을 앗아가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라디오도 귀하고 TV도 없던 시절, 몇 십리 길을 걸어서 영화 한 편 보면서 울고 웃으며 넉넉하지 않은 살림의 시름을 달래던 그런 극장은 이제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기업의 영화 산업 장악 이후 단관 - 스크린이 오직 한 개인 극장 - 극장은 문을 닫았고, 그나마 생존하고 있는 극장도 물어 찾아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추억의 공간이자 삶의 정취가 남아있던 곳은 사라지고, 대신 어딜 가더라도 똑같은 실내 장식에 영화라는 ‘상품’의 판매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자들의 기억 속에는 옛날 극장에 도둑 영화를 보러 들어갔던 스릴 넘쳤던 한 때나 학생 동원 단체 관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극장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를 포함하여 전남지역의 극장 숫자는 66개에 달하였으며, 군 단위 지역에 기본적으로 두 개의 극장에서 필름이 돌아갔다. 이들 수치는 그만큼 영화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것을 의미하는데, 영화는 시대를 가로질러 ‘호모비디오쿠스’인 대중의 욕망을 채워주는 강력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지난 시간 동안 호남지역에서 생겼다 사라진 극장에 대한 추억 여행을 의도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이번 호에는 그 첫 번째로 광주시의 극장 역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말문을 트고자 한다.
 
한국사회에 영화가 등장한 것은 190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였던 영화 상영이 담배 판매와 전차 선전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도래는 근대화와 식민화의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 당시 필름은 외국 거리의 풍경이나 화차(火車)를 보여주는 활동사진이었지만, 처음 접하는 낯선 풍물은 관객에게 황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관객들은 영화보다는 기계 매체 자체에 놀라워하였는데, 사람이 어떻게 조그마한 영사기 안에 들어갔을까, 신기해하며 기계를 만져보았다고 한다.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광주에 최초로 등장한 극장은 1910년대 후반의 광주좌(光州座)이다. 현재 동구 충장로의 파레스호텔 자리에 있었다.

광주좌는 얼마 있지 않아 사라지게 되고, 1930년대 들어 제국관(帝國館, 현재 무등극장)이 개관을 한다. 일본인 구로세 도요다가 경성의 명동 명치좌 건물의 본을 따서 지었던 무등극장은 관람객을 674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제국관은 당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고(故) 전기섭이 해방이후 운영을 맡게 되면서 공화극장이라 개칭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미군정의 눈에 ‘공화’라는 말이 사회주의 냄새를 풍긴다하여 ‘동방예의지국’에서 따온 동방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된다. 동방극장이 무등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제국관이 식민시대 일본인이 세운 극장이라면, 현재 동구 충장로 5가의 광주극장은 조선인 최선진이 지역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하던 날 개관을 한 광주극장은 총 1,250명을 수용하였는데, 이는 당시 광주부민 40명 당 1명은 입장시킬 수 있는 규모이었다. 제국관에서는 일본 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와 가부끼(歌舞)가, 광주극장에서는 창극과 국극이 스크린과 무대를 주로 차지하였다. 식민시대 이들 극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된다.

 

* 위경혜님은 영상문화연구가로서 국내외에서 영화 및 동아시아 문화학을 연구해온 전문가입니다. ‘문화’ 담론의 소용돌이에 놓인 광주에 관심이 아주 많으며 현재는 중앙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광주의 극장문화사>를 발간하였고, 지금은 <호남의 극장문화사: 인접문화의 협동>이라는 책 발간 막바지 작업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