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의 지표가 될 작은 현판

지금까지 6년간의 경험으로 보건데 우리 마을은 광주에 비해 최소한 열흘쯤 봄은 늦고 가을은 일주일쯤 빠른 곳이다.

기온도 광주보다 2, 3도는 낮아 추위에 약한 무화과, 비파, 꽃치자, 돈나무 등은 겨울 노지에서는 견디지 못하는 곳이다. 아마 마을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아침 저녁으로 숙지원의 공기도 상쾌하면서 싸늘하다. 추운 지역이고 또 숙지원이 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지형적인 영향도 클 것이라고 본다. 아직 반팔 옷을 정리도 못했는데 벌써 긴 팔 옷을 꺼내 입으며 계절의 빠름을 다시 실감한다.

어제(10월 9일), 숙지원에 현판을 걸었다. 아내의 뜨락을 숙지원(淑芝園)이라고 명명한지 수년째, 그동안 숙지원임을 알리는 표지가 없었다. 역사가 오래된 집도, 이름난 정원도 아니도 더구나 내놓을 이름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현판이냐고 웃어버리는 아내와 의논할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대문 곁에 작은 표지석이라도 새길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사 후 우연한 자리에 글씨에 일가견이 있는 매제에게 넌지시 내 뜻을 말했더니 매제가 서둘러 예서체의 글씨가 돋보이는 현판을 만들어 왔다.

매제 덕에 표지석보다 더 아름다운 현판을 얻은 것이다. 글씨는 남도에서 알아주는 서예가 일속 선생의 휘호에 서각도 이름이 높은 분의 솜씨라고 했다. 받아 든 아내는 비바람 치는 바깥에 걸어두기 아까운 물건이라고 반겼다.

한글날에 한자로 새긴 현판을 다는 것이 세종대왕님께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매제의 선물이라는 핑계를 현판 자락에 덧붙이고 말았다. 대문의 왼쪽에 철공소에 부탁한 철재 기둥을 세우고 현판을 걸고 보니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부부들 중에는 원수가 만난 것처럼 서로 미워하며 싸우다 죽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들었다.
영원토록 살자던 맹세가 아직 허공의 메아리로 남아 있는데 사이에서 낳은 자식도 헌 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갈라서는 부부도 많음을 안다.

아내와 살아온 34년.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과 시작한 살림. 더러는 의견이 안 맞아 큰소리가 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을 팽개치고 갈라 설 생각은 한 적이 없으니 그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밖으로만 나돌았던 나를 대신해 오랫동안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세월이 결코 녹녹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결코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챙기지 않았다.

淑芝園. 현판이 없다고 숙지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주변 사람들이 아내와 나의 일터요 놀이터임을 모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판 하나로 60을 바라보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현판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오랜 꿈 하나를 이룬 것 같아 자랑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노을 지는 서편 하늘을 보며 살아갈 땅, 현판은 그 숙지원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상징이며 소박하고 편안한 정원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한 매듭이요 잔잔하고 평화로운 여생을 만들어가는 지표가 되어줄 것이다.

짧은 가을 해가 빠르게 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될 것들을 헤아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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