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이라도 편한 세상에서 살자

사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사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손바닥처럼 드려다 보고 있었다. 사원들끼리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누가 세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시대였다.

술을 한잔 마신 친구가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불평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김일성이 나라도 아닌데 말도 맘대로 못한다고 했다. 잠시 후 택시가 섰다. 파출소 앞이었다. 직장에서 잘렸다. 유신시절 KBS에서 있었던 실화다. 그는 문민정부 때 복직했다. 나이 좀 든 KBS출신들은 다 아는 얘기다.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공포였다. 방송국에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조정관이 있었다. 제왕이었다. 진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조정관은 국장실을 발로 밀고 드나들었다.

하루에 피죽 한 끼를 먹고 살아도 마음이 편해야 산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자행된 민간인 사찰 역시 유신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사찰당한 대표적 인물인 김종익은 완전히 패가망신했다. 자살을 생각하고 수면제를 사 모았다. 그게 바로 총리실에 있는 자가 자행한 일이다. 청와대에도 보고가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또는 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돼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다”


1975년 5월13일에는 긴급조치 1호와 7호를 하나로 묶은 긴급조치 9호(국가안정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된다. 이것이 박정희 독재를 유지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긴 얘기가 필요 없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 8명이 사형집행 됐고 가족에게 시신도 인도하지 않았다. 사법살인으로 전 세계가 규탄했다.

유신독재의 총책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바로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 후보다. 박근혜가 한마디만 하면 된다.

‘아버지가 한 일이지만 내가 대신 사과한다. 아버지가 잘못했다’

박근혜 후보가 그냥 평범한 신분이라면 아무 말 안 해도 좋다. 그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다. 잘못을 사과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사과는 커녕 ‘불가피한 선택’이니 ‘최선의 선택’이니 따위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비난여론이 들끓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마지못해 한다는 소리는 인혁당 유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만나자고 하는가, 사과만 하면 된다. 국민과 억울하게 사형당한 영령들에게 사과하라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과거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 시대 상황과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기가 막히기에 앞서 소름부터 돋는다. 박근혜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지금도 이렇다면 국민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국민은 또다시 유신의 망령과 함께 살기를 거부한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헌신할 특권밖에 없다

“대통령이 되면 오로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만을 행사할 것” “대통령이 권한 밖의 특권을 갖는 일은 결코 없을 것”

문재인의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가장 마음에 깊이 박힌 것은 바로 이 말이다.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 밖에 특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자신의 비극은 물론이고 나라도 비극을 겪어야 했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법이라는 과대망상이다. 이런 과대망상이 소통을 막고 불통이 되게 한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불통이다. 소통의 부재다.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우스개가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면 ‘해 봤어?’ ‘가 봤어?’ 라고 한다. 이건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다. 지금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역시 불통이고 독선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은 종결된다. 당의 최고위 간부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오만과 독선과 불신이다. 또한, 성장과정에서 보고 겪고 배운 박정희 독재에 대한 맹목적 신봉이다. 독재처럼 효율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어디 있는가. 안 되는 것이 없다.

박정희의 폭군적 망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일화가 있다. 지금 생각을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유신독재 말기인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있은 뒤 박정희와 차지철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차지철이 말을 받았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빨리 잊어야 하는데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영국에서 발행된 인명사전에 박정희가 킬링필드 주역 폴 포트보다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고 한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인명을 가볍게 여길 분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가슴 깊이 숨어 있는 공포는 박근혜 후보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얼굴이 두 개로 다가온다. 화사한 미소뒤에 숨어 있는 차가운 냉소.

이제 우리 국민은 공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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