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살할 권리조차도 없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본 것은 주검이었다. 한겨레신문을 펼치자 27면에 등장하는 사진, 처음에는 무슨 사진인가 했다. 자세히 보는 순간 차가운 소름이 등골에 솟았다. 가슴이 떨렸다.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남자, 왼손은 배에 얹고 오른손은 머리위쪽에 놓여있다. 머리가 놓여있는 아래쪽은 온통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주검이었다. 최종길 교수의 주검이었다.

한 동안 숨이 멎는것 같았다. 눈을 주검에서 떼지 못한 채 지켜봤다. 장소는 중앙정보보부 마당,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19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 마당에 주검으로 누워 있었다.

최종길 교수의 주검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 얼마나 덧없는 짓인가. 아무 죄 없이 죽었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 다른 주검이 있었다. 두개골 오른 편이 함몰된 채 유해로 나타난 주검, 장준하 선생이었다. 약사봉에서 추락사 했다는 장준하 선생은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국 대한민국 하늘아래서 두개골이 함몰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나타났다.

지금이 새벽,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너무도 비참한 8월이었다. 능력이 있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이었다.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에서 우리는 역사를 복원해 낸다. 진실이 숨겨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는 이런 세상을 보지 말자고 다짐한다.

장준하 선생의 유해를 보면서, 최종길 교수의 시신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두 분의 영혼은 자신의 시신 곁은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부인하려는 인간들 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인간은 생명을 없앨 권리가 없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산 길 들길을 가면서도 발밑에서 밟혀 죽을지도 모르는 미물들을 생각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뺏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마치 그런 권리라도 있는 듯 남의 생명을 빼앗고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지금도 이 땅 어느 산골, 깊은 바다 속, 어디에선가 세상에서 살아진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행방불명이다. 일본에서 납치되었던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게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누가 인간에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를 주었는가. 신도 그런 권리를 줄 권한이 없다. 그러나 마치 신에게서 위임받은 절대권한이라도 있는 듯 인간의 생명을 마구 빼앗을 인간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독재자들이다.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이승만 독재치하에서 암살당한 김구 선생, 여운형 선생, 4.19 때 총 맞아 숨진 대학생들.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숨진 민주투사들, 장준하 선생도 최종길 교수도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도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죽으면 개도 안 물어 갈 아무것도 아닌 권력을 탐해서 남의 목숨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인 살인자들. 지금도 이 세상에서 버젓이 살고있다. 양심의 가책도 없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입에서는 ‘군사반란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기막힌 말이 나온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조사가 끝난 것이라는 망발이 나온다. 박정희 독재자의 죽음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짐승과 인간이 구별되는 척도는 양심이다. 아침마다 아파트 앞에서 빈 상자를 줍는 할머니를 뵈면서 아파지는 가슴은 미안함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대낮에 술이 취해 잠든 노숙자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연민이다.

그들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도자들이다.

인간의 목숨을 평등하다. 풀밭을 기는 벌레도 죽일 권리가 없다. 하물며 인간의 생명이야 더 말해 뭘 하랴.

박근혜 후보에게 부탁한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밝혀진 것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사인을 밝히는데 박 후보가 힘을 써야 한다. 그게 지도자의 자세다. 얼마나 사람다운 모습인가.

박후보도 슬픔을 당해 본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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