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독재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카다피의 처참한 모습이 실린 신문을 펼친다. 끔찍한 모습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다. 인간 본성의 잔인한 단면인가. 그 밖에 다른 이유라도 있는가.

카다피는 독재자다. 42년 동안 리비아를 철권으로 통치한 독재자다. 그의 독재를 새삼 설명하는 것은 낭비다. 얼마나 많은 국민을 죽였는가.

하수도 구멍에 혼자 숨어 있다가 총을 맞고 숨진 카다피의 시신은 정육점 냉동고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처참의 극치다. 부관참시란 형벌도 있었고 육시처참이란 것도 있었다. 극에 달한 국민의 분노는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를 환영하고 있다. 독재자의 영화야 어찌 됐던 인간 최악의 처참한 말로다.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도 최후는 비참했다. 전쟁에서 패배 후 땅을 파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그도 역시 독재자였다.

우리도 독재를 경험했다. 어느 독재자의 폭정 못지않은 혹독한 억압과 시련을 겪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박정희의 군부독재, 전두환의 군사독재. 독재라면 우리 국민도 이가 갈릴 정도로 풍부한 경험자다.

이승만은 4.19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 이국땅에서 객사했다. 박정희는 민주정부를 뒤엎고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집권한 후 19년간 악명 높은 독재를 휘둘렀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궁정동의 안가에서 향연을 즐기다가 측근인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인생을 끝냈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망한 독재자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부지기수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카다피의 처참한 말로를 보면서 오히려 담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체험한 독재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았기 때문일까. 독재자의 말로는 저래야 한다는 인과응보 심리 때문일까.

독재자들의 자기도취는 정신병적이다. 유아독존이다. 병적인 자기 과신이 쿠데타를 획책한다. 자기만이 나라를 구한다는 정신병적 오만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방해가 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반대하는 말도 행동도 말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차없이 제거됐다.

외국의 독재자들이 반대자들을 처형한 숫자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게 처형을 당하면서도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자유를 갈망하는 불길이 더욱 타오르는 것은 자유란 바로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기 때문이다.

자유당 독재 시절과 유신 독재 시대, 그토록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4.19 당시의 총탄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달리던 청년 학생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총탄 속에서 피에 젖은 가운을 입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업고 뛰는 의대생들의 모습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절감한다.

독재자의 최후는 역사가 말해 주듯 비참하다. 바로 우리가 목격한 카다피의 모습이나 박정희의 최후. 그럼에도 독재자는 아직 세계 도처에 있다. 하나둘씩 민중봉기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라고들 말한다. 아니라고 펄펄 뛰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속에서 삶을 살고 있는가.

세계적 평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34위라고 했다. 순위가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평가와 느낌이 중요하다. 민주주의 국가의 잣대가 되는 한국의 언론자유는 80년대 독재국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70위라고 한다.

순위의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아도 국민이 느끼는 언론자유의 체감은 매일처럼 보고 느끼는 언론을 보면 알 수가 있다. MBC 기자들이 말했다. ‘우리 기자들 자신이 부끄럽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국민이 느끼는 민주주의의 척도는 바로 이런 것이다. 국민도 부끄러운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소통의 부재다. 소통의 부재는 독재다. 지금 국민은 이 땅에 소통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할 정도로 이 사회의 소통은 없다. 1인 마라톤의 혼자 메달이다.

불통의 대명사로 꼽히는 이명박 대통령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말은 ‘가 봤나, 해 봤나’다. 이것으로 끝이다. 스스로 소통과 대화를 단절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오늘날 이렇게 나타난다. 혼자만의 만족이고 혼자만의 찬사고 혼자만의 만세다. 그 결과가 바로 국민이 느끼는 혐오와 권태다.

퇴임 후 사저를 위한 집터를 사는데 아들이 등장했다. 국고를 낭비했다. 비리요 불법이었다. 국민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꼼수라고 했다. 왜 이래야 하는가. 국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허망하게 짓밟아야 하는가. 이러면서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이 어디로 나온단 말인가.

4대강 준공행사를 2개월이나 앞당겨서 치렀다. 서울시장 선거를 의식해서라고 국민은 생각한다. 이 역시 꼼수다. 국민이 안 믿는다.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10월 26일이 서울시장 선거다. 오세훈의 소통 부재가 가져 온 결과가 500억을 낭비하는 시장 선거를 불러왔다. 과연 오세훈의 소통 부재만이 원인인가.

이 사회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불법과 비리는 국민들로 하여금 분노의 비등점에 이르게 했다. 광화문 광장을 꽉 메운 시민들. 서울시민의 얼굴에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피부관리를 위해서 1억 원을 서슴없이 쓰는 서울시장이 우리의 삶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시민들이 믿을 수 있을까.

박원순의 병역을 비판하면서 판사인 자신의 남편의 불법에는 침묵이다.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이 동료의원에게 자기 부친의 학교를 감사에서 제외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아니라고 부인한다. 이런 것이 이중인격이 아닌가. 서울시민은 이중인격자인 시장을 원하고 있는가.

시민에게 약속을 한다. 자기가 알뜰하게 규모 있게 살림을 해서 서울시정을 잘 이끌어 가겠다고.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1억짜리 피부 관리가 알뜰한 규모란 말인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자기가 하는 일이 옳고 그른 것은 안다. 우리 국민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살았다.

카다피도 자신의 운명이 저렇게 비참하게 끝날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줄은 알았어야 했다.

권력으로 총칼로 국민을 잡아 가둘 수는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시간을 가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도 내년이면 끝이 난다. 그다음 그의 운명은 국민이 걱정할 것이 없다.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까.

남의 불행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 값을 받는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카다피의 말로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죄를 진자가 받아야 할 업보에 대한 신의 섭리를 무겁게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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