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을 찾아서④]

무등산 중턱에 자리한 어머니 품속 같은 도량... 세상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
현지 주지스님, "통일 생명운동에 앞장"... 토요일 오후 '열린법당' 운영 예정

광주 시내 옛 전남도청 앞에서 시내버스 1187(무등산 높이)번을  타면 버스는 구불구불한 무등산  숲속 길을 한참 달려 종점이 있는 원효사에 도착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들의 지친 마음은 어머니의 품속 같은 무등의 품에 안겨 동심으로 돌아간다.

광주의 도심에 1000m 이상 높이의 명산이 있다는 것도 우리들의 행복이다. 이백은 그의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御虛舟)>라는 시에서 “오악에 신선 찾아 먼 길 사양치 않고/ 일생에 즐기는 것 명산 찾아 노니는 일”이라고 노래했다. 우리는 일생 동안 과연 몇번을 명산을 찾아 노닐수 있을까.

예로부터 명산을 찾아 노니는 일이 인간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사람은 자연에서 모성을 찾고 자연으로부터 다시 치유되는 자연의 일부이며 전체라는 것을. 그래서 불교에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계법에 의해 생명이 빛나는 것이며 계법에 의해 지혜가 성숙되는 것이다.” 평소 화두처럼 가슴에 품은 말씀을 들려달라고 청하자 원효사 현지 주지스님이 무등산의 정기를 품은 법문을 들려 주셨다.

▲ 회암루 전경. ⓒ광주인

원효사는 원효 스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로 절의 명칭이 독특하다. 원효가 죽고(686년) 400년이 지난 1101년 고려 숙종이 원효대사는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시호가 없어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원효대사는 스스로 파계하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하며 <무애가(無㝵歌)>를 부르며 표주박 춤을 추고 돌아다닌 데서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 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스님의 노래 중에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대목은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생기는 아주 유명한 전설이다.

이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왕은 이 말을 알아듣고 요석공주와 함께 지내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훗날 학자로서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원효스님이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다는 원효대사의 당나라 유학에 관련된 기록도 원효스님을 이야기할 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설이다. 원효스님은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유학을 시도했다.

▲ 원효사 경내. ⓒ광주인

34세 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 때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배고프고 지친 그날 밤 땅막에서 하루를 자게 되었는데 한 밤 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다. 그 물 맛은 감로수처럼 맛이 있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고, 간밤의 바가지 물은 해골바가지 물이란 것을 알았다. 갑자기 배가 뒤틀려 어제 밤에 먹었던 물을 토해냈다.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대사는 귀신의 장난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 원효사 회암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눈덥힌 무등산의 비경. ⓒ광주인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心生則 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心滅則 龕墳不二)”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깨달았다. 요즘 무턱대고 미국이나 외국의 유학만을 고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새겨 볼만한 말이다.

원효사행 버스의 종점에 이르면 오른쪽의 커다란 바위에 새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무등산 원효사.'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원효사 일주문이 산문을 표시하며 경건하게 참배객을 맞는다.

일주문(一柱門)은 원효사(元曉寺)로 들어가는 첫 번째의 관문이다. 원효사의 웅장한 일주문을 보면 원효사가 범상하지 않은 절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절에서 말하는 '일주문(一柱門)'은 세속에서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지는 건축물과는 달리 불교에서는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큰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고 서 있어서 일주문(一柱門)이라 부른다.

▲ 회암루에서 바라보는 눈덥힌 무등산. ⓒ광주인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하는 시각부터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라는 뜻이 담겨있다. 수행자로서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갖고 자비스런 마음으로 구도자로서의 길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하기 전은 중생이 살아 온 세간(世間)을 말하는 것이고,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한 곳은 절 안의 영역으로 속계(俗界)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이다.

불교에서는 절의 모든 문을 통칭하여 '산문'이라고 하는데 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청정하고도 장엄한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불도량은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행하는 터전을 말한다.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려면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文),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이러한 문들을 일컬어 불교에서는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일주문은 사찰의 입구라는 뜻이다. 곧 사찰이 보이니 마음을 바르게 세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속세로부터 벗어나 부처님의 대 진리인 진리의 터전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를 갖추어 부처님께 합장을 해야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나는데 천왕문은 부처님과 법, 그리고 스님과 불자들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이다. 천왕문은 외부의 악한 기운이나 침입자로부터 사찰을 보호하여 청정도량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사천왕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서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섭다"고 하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 원효사 경내의 석간수. ⓒ광주인

사찰을 참배할 때 마다 일주문을 지나고 나타나는 천왕문의 사천왕이 궁금했었다. 

사대천왕(四大天王)은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이 신장들은 제석의 명을 받아 '4천하'를 돌며 사람들의 동태를 살펴서 제석천에 보고 한다.

사천왕에서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방의 수호자, 16선신의 하나로 불교의 수호신 치국천(治國天), 동방천(東方天), 지국천왕이라고도 한다. 왼손을 뻗어 칼을 들고, 오른손은 구부려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 원효사 경내 지장보살님과 신장. ⓒ광주인

남쪽의 수호신 증장천왕(增長天王)은 4천의 남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서역을 지나오며 갑옷을 입게 되고 손에는 다른 사천왕과는 달린 악기의 일종인 비파를 들고 있다. 구반다, 폐려다 두 신을 거느리고 용을 지니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수호신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비류박차라고 하는데 갑옷을 입고 삼치창을 들고 있다. 입을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므로 광목 또는 악목이라 불리며, 여러 가지 웅변으로써 나쁜 이야기를 굴복시키므로 잡어(雜語)라고 불리기도 한다. 용, 비시사 두 신을 거느리고 손에는 탑을 가지고 서있다.

그러나 원효사에는 일주문을 지나고 아주 좁은 산속의 숲길이 이어져 절을 찾는 이들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봄이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작은 꽃잎들의 운무에서부터 여름의 조화와 절정, 그리고 절제의 미덕을 배우는 가을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붉은 꽃잎들의 사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천상인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원효사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탑 앞에는 넓고 시원하게 확 트인 회암루가 있어서 원효사 참배객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다. 멀리 장불재를 바라보고 위풍도 당당하게 서있는 회암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품 안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즐거움을 말하여 주는 것 같다.

회암루(晦巖樓)란 '안개로 덮여진 기괴한 암석과 노송으로 우거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는 높은 다락'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광주시민의 휴식처와 같은 공간으로 여름이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원효사를 참배했을 때 회암루에서 바라보이는 무등산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탄복 했었다. 무등산이 그렇게 아름다운 명산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 원효사 현지 주지스님. ⓒ광주인

원효사(元曉寺)는 광주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다. 지금은 현지 스님이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 전력으로 포교하고 있는 자비 도량이다. 현지 스님은 "올해 중요한 불사로 회암루 밑 주차장을 옛날의 주차장 터로 옮겨 원효사를 찾는 참배객들이 조용히 쉬었다 갈 수 있는 기도 도량이 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지 스님은 현재 광주전남우리겨레하나되기 상임대표직을 맡고 있다.  “지금은 우리 민족이 둘로 형제가 갈라져서 만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반쪽으로는 살 수 없고 빨리 통일이 되어서 인구가 1억은 되어야지 지금의 갈라진 채로 인구 몇 천 만은 너무 작다. 인구가 1억은 되어야지 나라가 힘을 쓸 수 있다” 스님이 통일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현지 스님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 10차례의 방북으로 북한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북한의 주민들과 내 생각도 말하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지금은 막혀버린 남북교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스님이 생명나눔실천본부 광주전남본부장은 맡고 계신 것은 "'남을 도우면 반드시 도운 것만큼 복이 온다'는 부처님의 인과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함"이라며  “우리나라는 이제 인연의 순환 관계 속에서 빈부가 조화되게 잘사는 나라가 되기를 발원 한다”고 말했다.

▲ 배웅해주시는 현지 스님. ⓒ광주인

현지스님에 따르면 무등산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있다. 이른바 원효팔경(元曉八景)이 다. 원효사를 중심으로 낮과 밤, 그리고 계절과 역사에 따라 긴 세월동안 무등산을 빚내주고 있는 경승이다.

무등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운치(무등명월 (無等明月)), 무등산 서석대에 넘실거리는 뭉게구름의 운치(서석귀운(瑞石歸雲)), 무등산 장불재 김덕령장군의 의병훈련활동에 얽힌 전설(삼전열적(蔘田烈蹟)), 무등산 원효폭포의 시원하고 장쾌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원효폭포(元曉瀑布)), 무등산 원효사에 해질 무렵 원효사에서 종치는 소리(원효모종(元曉暮鐘)), 무등산 의상봉에 비 내리는 해질 무렵 운치(의상모우(義湘暮雨)), 투궁봉 안양사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염불소리(안양노불(安養老佛)), 무등산 늦재에 머슴들의 풀피리 소리(만치초적(晩峙草笛))가 바로 원효팔경이다.

▲ 원효사의 배롱나무. ⓒ광주인

"그저 착하게 살고 싶다"는 현지 스님의 말씀이 눈 덮인 무등의 모습처럼 다가서서 오랫동안 귓전에서 들려왔다. "올해부터는 토요일 오후에 밤새 기도 정진을 하고 싶은 불자들을 위하여 원효사의 열린 법당을 계획"하고 계시다는 스님의 말씀에 그날이 기다려 진다.

▲ '원효모종' 앞의 나무. ⓒ광주인

겨울 눈덮인 무등산을 원효사에서 바라보니 한폭의 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 햇빛을 받아 빛나는 무등산이 금강석 처럼 눈부시다.  

무심히 지나던 나의 발걸음을 붙들던 원효사의 모종 소리 그리고 거기에 이제는 하나를 더해 원효사에서 바라보는 눈덮인 무등산이 '원효9경'임을 자랑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원효사 종무소: (062)26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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