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출판 경위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의도(?)는 무엇?

1980년 5·18항쟁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과 관련하여 집필자인 황석영 작가에 관한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기사 등의 내용을 반박하며 실제 당시의 출판 경위를 밝힌다.

필자 전용호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으로 5·18항쟁에 ‘투사회보’ 제작자로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현재는 5·18항쟁 국가유공자로 광주에서 살고 있다. 전용호는 1980년대 초반, 광주·전남기독청년회, ‘일과 놀이 문화운동기획실’, ‘민중문화연구회’등의 조직에서 상임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자료수집 등 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책의 집필과 제작경위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 책 표지.
아래 글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황석영 작가의 집필 경위와 관련하여 2010년 월간<신동아> 12월호가 인용한 2009년 5월 19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다.

“황석영은 그동안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라는 책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이 책을 쓴 작가가 황석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글은 광주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기자이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인 이재의 기자가 쓰고 상황지도는 조양훈이 그렸다는 구체적 반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그 책이 황석영 기록이라고 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황석영은 이에 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왜 ‘황석영 기록’이란 이름을 넣어야 했는지, 그 책의 인세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왜 이 책의 지은이라고 약력에 버젓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석영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가장 잘못된 대목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왜 황석영이 마지막 작업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인세를 황석영이 가져갔다고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도 그렇다. 그리고 정리 작업을 맡았던 이재의도 당시에는 대학 제적생 신분이었으며 훨씬 나중인 1990년대 이후에 광주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위 기사는 내용도 조잡하지만 기사 작성의 의도도 매우 불순한 것으로 보인다. 정론지라고 불리는 오마이뉴스에서 왜 이런 기사를 내보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중략)---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중략)---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이 비난과 비방투의 기사는 매우 비겁하고 유치하면서도 졸렬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집필과 출판 경위를 밝힌다.

5·18항쟁이 발발한 후 참혹하고 처절했던 항쟁의 진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온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항쟁의 현장인 광주에서 모든 참상을 몸으로 겪고 낱낱이 지켜보았던 광주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위 ‘5·18항쟁백서’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 중 항쟁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하고자 했던 당시 광주지역 그룹은 크게 세 갈래였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운동가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1979년 광주에 설립된 현대문화연구소 정용화 소장(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다. 둘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한 조봉훈 이다. 셋째는 전남대학 출신 민주화 운동가인 이재의, 조양훈 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민청학련’ 사건 출신 운동가 윤한봉이 지역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총의를 모아 1979년 설립한 연구소로 광주·전남권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연구소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후원자들을 조직하여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시국 강연회 등 계몽문화운동을 펼쳤다.

▲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2008년 10월 8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초청으로 교육공학관에서 '나의 근작에 대하여'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광주인
정보과 형사들은 현대문화연구소 전화를 도청하고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79년 11월 윤한봉과 김희택의 뒤를 이어 정용화가 소장이 되었다. 5·18항쟁이 발발하자 정용화는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비교적 일찍(1980년 11월) 형집행정지(형면제?)로 출감했다. 5·18항쟁 이후 정용화는 광주권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유일한 소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는 조봉훈의 활동이다. 조봉훈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하였다. 조봉훈은 1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시나 소설을 읽고 공부하던 문학서클 ‘아들’의 회원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5·18항쟁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여러 차례 만들어 광주시내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30일경 그 중의 한명이 잡히면서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그 때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되어 광주에서 도피하고 있던 소준섭(외국어대 78학번)도 조봉훈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조봉훈 도 5·18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셋째는 이재의 등의 활동이다. 이재의는 5·18항쟁 이후인 1980년 9월 경 전남대학에서 유인물 배포와 관련하여 구속되어 형기를 마쳤다. 이재의는 ‘5·18항쟁백서’ 작업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세 갈래로 진행되다가 1983년께부터 작업이 통합되었다. 광주 운동권에서 여러 팀이 5·18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작업이 통합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조봉훈의 구속도 통합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었다. 자료를 한 군데로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담할 사람에게 제공할 최소한의 활동비도 준비되어야했다. 1984년 11월 18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창립준비위원장; 정용화)가 창립(의장; 정상용, 수석부의장; 정용화)되면서 5·18백서 간행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때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임상택(당시 서울상대 중퇴)이 자신의 저서(알기쉬운 경제이야기?)를 출판하고 받은 인세 전액을 5·18백서작업 비용으로 정용화 부의장에게 넘겨줬다. 정용화는 자료취합과 정리 작업 실무를 이재의에게 맡기고 매월 일정액의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5·18기념일에 5·18백서 간행을 목표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5·18자료 수집과 정리 및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초 5·18백서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출판 문제가 거론되었다. 누가 집필의 책임을 지고 어느 출판사에서 제작할 것인가였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치하로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를 두고 서울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가들이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서울에서 회의 참석자는 정상용, 문국주, 나병식 등이고 광주에서는 정용화, 이재의, 전용호 등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광주출신 민주화운동가인 나병식이 운영하는 풀빛출판사에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출판 책임은 당시 광주권 민주화운동 연대기구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책임을 지고 대표 집필은 소설가 황석영 씨에게 의뢰하기로 하였다.

황석영 소설가가 집필 책임을 졌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출판했을 때 대중적 파급 효과가 커지면 5·18항쟁의 진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황석영 소설가가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에서 쉽게 연행하거나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거친 문장의 초고를 명쾌하게 다듬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보다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는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황석영 씨가 그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출판사 대표인 나병식 씨의 의견이기도 했다. 출판 결정이 되기 전인 1985년 초에 서울에서 최종 회의가 있었고 이 자리에는 김근태(당시 민청련 의장, 전 국회의원), 신동수(민문연, 풀무원 창립위원), 정상용(도청항쟁지도부 외무부위원장, 전 국회의원), 채광석(민통련, 문학평론가, 작고) 나병식(풀빛 출판사 대표) 황석영(소설가) 등이 참가했다. 황석영은 이 자리에서 대표집필의 책임을 질 것을 기꺼이 수락했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책임 및 각계 배포 문제였는데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조직 사건이 될 수도 있으니 출판사와 집필자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연루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차적 접촉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정용화에 의해 이재의 팀이 정리한 초고가 같은 해(1985년) 3월 초 전용호를 통해서 황석영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초고는 문장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여기저기 중복되어 있어 나중에 완성된 원고 분량의 서 너 배 쯤 되었다.

황석영 작가는 약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그 원고를 다시 정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5·18항쟁을 체계적으로 담은 최초의 기록으로 완성해냈다. 원고는 풀빛출판사로 넘겨졌고, 제작과정에서 사찰당국에 의해 1만권이 통째로 압수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사건 때문에 나병식 사장은 수배가 되었고 수배 중에 몰래몰래 제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은 디자인도 없는 하얀 백지의 표지로 시중에 배포되었다. 그 사건으로 나병식은 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았으며, 황석영은 도피 중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다. 당시의 공안 당국은 김지하 시인의 전례를 보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황석영을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되면 광주의 진상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출국을 권고했다.

황석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작가대회’에 참가했다가 유럽, 미국, 일본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광주항쟁 보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해외 운동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결집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황석영은 애초부터 인세를 원하지도 않았고 풀빛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주는 인세는 정용화에게 전달되었으며 정용화는 그 돈으로 광주권 민주화운동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황석영은 어떠한 작업 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또한 당시의 상황 아래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 과정에 대하여 우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대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이 동참했던 작업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방북과 십여 년에 걸친 망명 투옥 등의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들은 잊혀졌던 것이다.

이제 삼십년이 지나서 이러한 비방과 헛소문이 나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한 광주의 불찰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작업은 당시 상황에서 개인의 공명심이나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니었고 ‘진상’을 알리는 위험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황석영과 광주운동권

황석영 작가와 광주운동권은 어떤 관계이기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표 집필을 맡게 된 것일까.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정리한 자료도 아닌데 대표집필이라는 역할로 자신의 이름을 걸 수가 있는 것일까. 보통은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그것은 황석영을 유명한 소설가로 보는 일반적 통념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당시 1980년대, 더 정확히 말하면 1978년부터 1984년 경까지 황석영과 광주 민주화운동권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석영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길산> 연재 중에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와 김남주 시인과 더불어 농민학교 운동에 참여했다가 광주로 옮긴 것이 1978년이었다. 광주에 온 황석영은 그 때부터 광주의 민주화운동권,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기획하고 참여하였다.

1978년 겨울에 광주 문화운동권을 창립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년 학생들을 위한 ‘탈춤학습’으로 서울과 다른 지방 연희패와의 연결을 해냈으며, 1979년 진보적 연희운동을 표방한 마당극단 ‘광대’의 창립과 1979년 돼지파동을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공연에 그는 후원자이자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깊숙이 참여했다.

1980년 5월 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때 황석영이 광주에 없었던 것도 극단 광대가 공연할 소극장의 계약금과 무대세트 등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돈을 구하러 갔다가 5·18항쟁으로 길이 막혀 광주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림동 그의 집에는 계엄사 합조대가 예비검속을 하러 들이닥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그에게 연락해준 바 있다. 새로 임대한 소극장에서 연습 중이던 극단 광대 단원들은 5·18을 맞아 궐기대회 등을 주도하면서 항쟁에 깊이 참여하였고 항쟁이 끝난 후에 김태종,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 등 여러 명이 투옥되고 수배되었다.

1982년 황석영 작가 운암동 자택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하여 제작한 노래극 ‘넋풀이’는 그 중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지금도 민중애국가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 노래극은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집 등에서 몇 구절의 시를 골라 노래 가사용으로 고치고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수상자인 김종률이 작곡하고 광주 민주화운동가이면서 노래를 잘했던 김은경, 오정묵, 임영희, 임희숙 등이 노래를 불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테이프는 당시 기독청년협의회에 넘겨져 2천여개가 제작되어 전국 대학가에 배포되면서 국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시작으로 십여 종류의 노래와 방송 테이프를 지하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들 모두 우리들과 함께 황석영이 주도하였고 비용도 모두 자신이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하여 저작권을 주장하거나 저작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사실상 그 후에 진행된 작업이다. 황석영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원고 마감에 쫓겨 원고 보따리를 서울까지 가지고 가서, 출판사 부근에서 여관생활을 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어떻든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민중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지도하고 직접 실천하고 온갖 경비를 모두 제공하였던 실질적인 광주 운동권, 특히 문화운동권의 ‘맏형’이었다. 1980년대 광주 시절 황석영의 활동은 같이 늙어가는 우리와 시민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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