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앞서 걸으셨던 리영희 선생님


서울에 모임을 갈 때마다 '병원으로 한 번 찾아뵈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더 사실거야'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바쁜 일정을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언론 보도를 통해 선생님의 영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녔거나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싸우던 많은 분들이 선생님을 ‘사상의 은사’로 모시고 또 따라 배우려고 노력했었고 저도 그런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지만,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의 중국 여행을 안내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 기억을 통해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무뎌져 가는 스스로의 삶을 다잡고자 합니다.

▲ 2003년 10월 10일 중국공산당 1차대회 기념관에서 필자(오른쪽)와 함께. ⓒ최만원

1992년 7월 초, 중국에 갔습니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직전이었죠.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이후, 개혁개방의 경제적 성과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던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통해 수교가 없던 중국에 가게 되었고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처음에 가졌던 새로운 대안사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점점 답답함과 회의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중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책으로만 뵙던 선생님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보낸 후 금방 잊어버린 채 번민의 나날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이론적인 입장에서 중국을 판단하거나 그 현실에 실망하지 말고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로 실천하면서 대안을 찾아가기를 희망’하신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연락을 하시는 거의 모든 분들에게 답장을 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몇 차례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답답함을 해소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 2003년 10월 11일 루쉰의 소설 <在酒樓上>에 등장한 시엔헝(咸享)주점에서. ⓒ최만원

이런 인연으로 저는 선생님의 두 차례 중국여행을 직접 함께하는 행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첫 여행은 1997년 4월로 기억하는데,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 하신 후 베이징을 둘러보시는 일정이었는데, 선생님이 존경한 중국작가 루쉰(魯訊) 기념관과, 광주출신으로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정율성(郑律成)을 비롯한 중국의 혁명 열사들이 묻혀있는 빠바오샨(八宝山)혁명열사묘지, 마오쩌뚱이 지키고 있는 티엔안먼(天安門)광장 등을 둘러 보셨습니다.

두 번째 여행은 지난 2003년 10월 제가 중국인민대학에서 중국공산당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첫 강의를 하는 동안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루쉰의 고향인 샤오싱(紹興)을 동행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당시의 여행담은 선생님의 회고록 <대화>에서도 잠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약 열흘 동안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입니다. 타인에 대한 자상함과 배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엄격함과 구체성입니다.

저는 ‘새는 좌우로 난다’(1994년 출판)를 두 권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베이징 일정을 마치시고 귀국하시면서 선생님은 일주일 동안 자신을 안내한 가난한 유학생에게 뭔가 작은 도움이라고 주기를 원하셨고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책에 ‘격려’의 글을 적어 주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공항에 모셔 드리고 학교로 돌아와서 밀렸던 논문준비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밤늦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첫 마디가 ‘최군, 미안해 내가 나이가 먹어서 그러니 이해하게’였습니다. 그제야 선생님께서 글을 남기신 책을 펼쳐보니 최만원(崔挽源)이 아니라 박만원(朴挽源)으로 제 성(姓)을 잘못 쓰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에는 ‘최’로 쓰셨다 다시 ‘박’으로 고쳐 쓰신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몇 차례나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며칠 후 저는 한국에서 날아온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한 권 더 갖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저는 말의 끝자리에 ‘~인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여행하면서는 특히 표현에 신경을 쓰면서 ‘존중’을 표시했지만 그것이 선생님은 몹시 불만이셨던 같습니다.

▲ 2003년 10월 13일 루쉰의 고향 샤오싱(紹興)에 있는 루쉰연구회 임원들과 함께. ⓒ최만원

루쉰 고향을 여행하시면서 마침내 선생님의 인내력이 폭발하셨습니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최군, 사회과학도는 구체적이고 엄밀해야 해!’ ‘~인 것 같습니다’는 남의 말을 하는 게야! 자신의 생각일 때는 ‘~입니다. 라고 말하고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해!’

저는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실 당시 선생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표정에서 ‘깐깐하고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어떤 미사여구를 바치는 것보다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시던 실천적 자세를 보다 적극적인 실천으로 뒤따르는 것만이 선생님이 안 계신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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