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참언론인 리영희선생을 보내며

이젠 정말로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 같습니다.
반세기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허물고, 시대정신을 일깨웠던
실천적 지성인이자 참언론인, 리영희선생께서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제가 리영희선생님의 책을 처음 만난 때는 90년대 중반으로 기억됩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좌우의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하고 날조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했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이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리영희 선생의 이 말씀은 당시 냉전적 사고와 편협한 가치관에 길들어진 저에게 지식인의 책임의식을 일깨워주는 커다란 죽비소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언론인이 되어서 지역의 한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지금도 나침반처럼 흔들림 없이 저를 채찍질하는 경구로 새겨져 있습니다.

언론인에게 진실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을까요? 리영희 선생이 60-70년대 기자생활을 했던 때나 지금이나 언론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 추구입니다. 암울했던 독재시절 그는 은폐된 진실을 들춰내 세상에 알리는 댓가로 혹독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64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추진’ 기사로 구속됐고, 71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이던 시절, 위수령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성명’에 참여해 해직도 당했습니다. 5월 항쟁 당시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신군부로부터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독재정권이 거듭 바뀌어 가면서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그는 정면으로 저항하고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속에서 진리을 위해 복무하는 진짜 기자였습니다.

정치의 풍향이 바뀌면 자신과 언론사의 이익이 기사나 방송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기회주의적으로 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몸담고 있는 방송국도 그런 비판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역도 마찬가지지요. 지역의 정권(자치단체장)에 따라 언론의 편가르기와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이 퇴색된 것이죠.
그래서 그는 후배기자들에게 충고하기를 '빼앗은 쪽의 입장에 서지 말고, 빼앗긴 쪽의 입장에 서라''권력에 한 눈 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한 세월 동안 나에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나에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무서운 말회초리입니다. 그가 수 십년 전 <기자협회보>에 후배들에게 말했던 이 비판에 대해 언론사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제는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줄 수 있는 선배이자 어른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연평도엔 포탄이 떨어져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4대강 사업으로 국론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지금, 리영희선생은 병상에서도 진실을 은폐하고 양심을 무너뜨리는 권력에 몸 바쳐 저항하라고 몸소 일깨워 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단호하고 치밀하고 가슴에서 우러나고 진실된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너무나 아쉽습니다. 그 다음의 몫은 우리 후배 언론인들이 짊어져야할 역사의 짐이겠지요.

이제 그가 내일 광주를 찾아옵니다. 생전에 그가 묻히고 싶었던 국립 5.18 민주묘지로 말입니다. 비록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운산이지만 그의 사상의 고향은 광주였나봅니다. 5.18묘역에서 생전에 뜻을 함께 했던 민주화 동지들, 5.18 영령들과 함께 영면에 접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척에 있는 민족민주열사묘역(망월동 구묘역)으로도 마실을 나올 지도 모르겠네요. 그곳에서 이재호열사와 통일을 이야기하고, 김남주시인과 자유를 노래하시겠죠.

세월이 흘러 언론인으로서 결기가 무뎌지고, 진실을 알리기가 두려워질 때, 저는 5.18묘역에 가렵니다. 시대의 나침반, 언론인의 참스승, 리영희선생이 그곳에 있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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