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영혼이 된 시-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박남준/실천문학사 8000원
1957년, 윤회의 업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다시 사람의 몸을 받은 바, 전라도 바닷가 작은 마을 법성포, 울면서 태어났다. 이후 오랫동안 슬펐다.
첫 싸움.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학년 높은 동네 아이 밑에 깔려 코피가 났다. 아이가 도망가자 집으로 쫓아가서 아이의 어머니에게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삿대질을 했다. 잠시 후 그 아이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아따 참 똑똑한 아들 뒀습디다이"하며 집안이 시끄러웠다.
첫 도둑질. 4학년쯤이었나? 점심으로 옥수수죽이 배급되었는데 미국의 원조물자인 옥수숫가루와 분유를 넣어 끓여주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쪽 작은 창고에서 소사 아저씨가 분유 포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친구들에게 그 정보를 알렸고 침투조를 결성,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밖에서 망을 보았는데 그때 심장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닥하게 굳은 분유. 어머니가 한동안 밥 위에 분유 덩어리를 얹어 쪄주었다.
지인에게 시집을 선물 받고, 으례 그런 도덕 선생님 같이 과묵한 시집이려니 지레짐작을 하고, 시집을 읽어내려 가는데, 시집의 뒤쪽에 나오는 ‘시인이 쓴 연보’ 너무 재미있다. 박남준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여기에 있었구나 시집을 덮으면서 가슴 마저 따스해지는 느낌, 시집이란 이런것이구나 그리고 그의 솔직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누가 그랬던가? 예술은 슬픈 거라고 그 흔한 대중성을 무슨 학문이니, 접근이니 하는 어려운 용어로 풀어먹고 오히려 민중에게서 예술을 분리시킨 그리하여 민중은 소외되고 예술은 타락된 자본주의의 예술에 대한 상업성도 맘에 들지 않고 여하튼 자본주의 세계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인것 만큼은 분명한듯 보인다.
봄날은 갔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그의 괴로움이 흠뻑드러난 그의 시가 좋다. 일부러 꾸미지 않고 욕을 풀어 놓았는데도 시의 맛이 뛰어 나다. 그의 시가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은 초탈, 초연의 경지에 와 있다. 마치 지리산의 정상같이.
첫눈과 빈 들녘
~ (중략) ~ / 땀 흘려온 것들이/ 고요히 익어가는 시간, 대지를 금빛 경이로 물들이며/ 겸손한 알곡들이 세상의 생명들에게 경배하는/ 가을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빈 들녘, 어찌 엎드려 절하지 않겠는가/ 한 그루 나무가 태어나 살아서는/ 지친 이들을 쉬게 하는 시원한 그늘과 향기로운 열매,/ 바람과 새들의 노래뿐일까 아낌없이 온몸 다 내어주는/ 나무처럼 남김없이 비워낸 빈 들녘에/ 그 수고로운 시간 알고 있다는 듯 첫눈을 뿌린다/ 소복소복 하얀 눈, 산에도 들에도 저 마른 풀꽃 위에도/ 이 겨울 쓸쓸한 것들 조금은 따뜻해지라고
지리산 내면에 깊이 안착한 그의 시가 숭배와 기원이 되어, 저절로 기도가 되어버린 시, 저절로 시가 되어버린 기도, 독자들은 그의 시 앞에 함께 자연을 노래하게 된다.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중략)~어느 잔인한 지뢰지대를 건넜을까/ 자전거를 개조해 페달을 손으로 돌리며 가는/ 두 발목이 잘린 사람들/ 흑백사진 같은 그들의 휑한 눈앞에 결코/ 배부른 디지털의 사진기를 들이댈 수 없었다/ 우리의 50년대가 저랬을 것이다/ 60년대가 70년대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재하며 있듯이/ 여기 또 머나먼 이국의 땅 국경의 거리/ 너와 나의 부끄러운 조국을 되새기게 한다/ 조국의 국경은 끝내 완강할 것인가/ 저렇게 건너가고 건너 올 수는 없는 것인가/ 남쪽 머나먼 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 보다 먼 내 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작가에게는 영원한 고통으로 남아있는 조국 분단의 문제가 박남준시인에게도 생의 여백을 주지않는다. 그럼으로써 시대의 책임을 다하려는 작가의 고통이 보인다. 지리산 산중에 살아도 그저 자유롭고 편한것 만은 아니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그가 아무리 산중에 산다고 하여도.....
지리산의 영혼을 닮고 싶었던 그의 시, 그리고 그대로 지리산이 되어 버린 그의 시가 왜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의 시는 지리산 처럼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청정하게, 우리의 눈을 끌어당기지도 붙들어 매지도 않았지만, 그의 시가 그대로 지리산의 바위이며, 나무이며, 산꽃이며,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가되어 우리의 영혼을 맑게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