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 춘천을 떠나며 ―

손학규


저는 오늘 지난 2년간 정들었던 춘천을 떠납니다.

그동안 저는 대룡산을 오르며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볼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민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앞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다듬어 보았습니다.


제가 살아온 길과 정치여정,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자체의 향방, 민주세력의 고난과 위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민심대장정에서 그러했듯이 그 궁극의 해답을 민심의 바다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 1. 성찰 : 역사의 퇴행, 그리고 정치역정의 반성
가. 양극화된 국민의 삶


정치에 대한 저의 성찰은 국민들의 고단한 삶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어느덧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승자독식의 경제, 그리고 그것과 함께 나타난 양극화 현상이었습니다. 국민의 삶이 피폐해 지고 사회는 분열되어 갔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아무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내일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나라 국민들의 삶의 희망의 사다리가 구조적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무너짐을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막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반성의 첫 출발점이었습니다.

경기도지사 시절 땀 흘리며 경기도 곳곳을 누비고 첨단산업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정작 성장이 분배와 고용확대를 견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위로부터의 성장이 아래의 풍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 즉 올바른 지향점을 갖지 못한 경제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나서서 해결해 주는 것이 나라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그것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 대기업을 위해서도 물론 정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치의 힘이 이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정치의 본령은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힘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정치는 이러한 대원칙을 구현하고 있질 못합니다.

정치는 그동안 민생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국민은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안과 절망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한 사회, 사람보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 “분열”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부자와 서민, 강남과 강북,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 그리고 크게 보면 남과 북까지 마치 장마에 무너져 내리는 절벽처럼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균열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소중한 가치들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어 온 이 양극화가 국민의 삶을 파괴하고, 대한민국 공동체를 분열시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국민총생산과 수출, 외환보유고, 국가신용등급과 같은 경제지표의 외피에 함몰되어, 내수의 불황,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위기, 비정규직 확산, 청년실업, 부동산 거품 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서민과 중산층의 삶의 기반, 더 심하게는 전방위적 파괴상황을 무책임하게 간과해왔습니다.

민주세력이 이와 같은 전방위적 파괴상황에 안일하게 대응하면서 방심하고 분열하는 동안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저 자신 역시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흐름 속에서 선진화 담론에만 도취되어 양극화가 우리 사회전체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세력이 끝까지 지켰어야 할 서민과 중산층의 “삶” 그 자체를 깊게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민주세력의 일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으로서, 대다수의 행복과 멀어져가고만 있는 역사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뼈저린 반성입니다.

나. 정치적 성찰

저 자신의 정치적 궤적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조용히 혼자 지내는 기간 중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과연 정치를 통해 이 나라에 기여한 바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바른 정치를 위하여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손학규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왜 정치를 하려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고 지난날을 되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성찰이 지난 2년간 제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춘천에 칩거하기 전까지 15년간의 정치 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보람도 느껴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치, 합리적인 정치를 구현하는 개혁의식에 앞장선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경기도지사의 직책을 통하여 국민의 복리 증진과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의 정치행위가 제가 속해 있는 정당, 정파의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점은 항상 불만으로 남아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론”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진 행위가 결코 옳다는 확신을 주지 못할 때에도, 부속품같이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상황도 많았습니다.

제가 한나라당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또 민주당에 합류한 정치행적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문민정부가 시작되면서 “개혁”의 회오리바람이 전국을 휩쓸 때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나도 개혁에 동참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물론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대다수의 동지들이 민주당(당시 평민당)에 있었지만, 저는 민주화운동의 뿌리는 같다는 점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이 민주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개혁정치 이후의 한나라당은 민주세력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민주진영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나라당에서 더 이상 제 신념과 가치를 펼 수 있는 천명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벽과 같았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민주화운동을 위해 변함없는 신념을 가지고 제 일생의 가장 큰 부분을 바쳤던 저로서는, 한나라당 탈당은 숙명이었습니다. 제게는 제 자리를 찾아온 서글픈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과거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되살아나고 억압적 정치로 회귀하는 최악의 퇴행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찬란한 젊음을 민주주의에 바쳤던 저로서는 제가 진정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절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한 이곳 민주당의 마당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다. 민주주의의 후퇴

민주주의의 후퇴는 우리 민주진영의 가장 큰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위해 바친 젊음은 제 삶을 추동시키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승리가 민주주의를 완성시켰다고 판단한 것은 저희들의 착각이며 오만이었습니다. 우리 민주세력은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시작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자만에 빠졌던 것입니다. 과거사를 정리하고 민주화의 공적을 회복하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튼튼히 뿌리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으니 선진화만 이룩하면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게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가 무참히 짓밟혀 으깨지는 광경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이미 어렵게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마저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민주주의란 이렇게 후퇴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이 앞을 가립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의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의 엘리트들이 갖는 자부심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경제적 바탕을 튼튼히 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민중적 가치를 확고한 반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지탱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경제적 충족과 사회적 안정과 대중적 가치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운명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에게 항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지금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전진을 자부하면서 민주주의의 파괴와 후퇴가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것, 그리고 지금도 속수무책으로 남아있다는 것, 이 사실이야말로 저의 또 다른 하나의 반성의 축입니다.

2. 2. 과제 : 진보의 가치와 공동체
가. 진보적 자유주의와 시대의 변화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10년전 새 밀레니엄을 맞아 전 세계가 술렁일 때 우리도 흥분하며 새천년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흘렀습니다. 길다면 길지만, 역사의 큰 줄기를 생각하면 그다지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10년간 세계도 우리나라도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꼭 10년 전에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 저의 문제의식은 세계화의 시대에 민주진보세력이 어떻게 적응하고, 글로벌 경쟁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급증하는 복지 수요와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대응할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갖출 것인가 하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진보적 자유주의의 해법은 당시 미국과 유럽을 풍미했던 “제3의 길”의 한국적 모색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대처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당의 노선을 “제3의 길”에서 찾았고, 미국의 빌 클린턴이 레이건이즘을 이기기 위해 “뉴민주당” 플랜을 추구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서 8개월 남짓 머무르며 클린턴 정부가 진보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이룩한 경제적 번영을 인상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도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그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진보적 자유주의”란 개념으로 정리해 보았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복지라고 하는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경쟁체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이념이고 노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은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지배적인 가치로서 군림했습니다. 그것은 세계경제질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던 신자유주의의 정점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어설픈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적 사태가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금융위기이고 경제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또한 저 자신이 내세웠던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말을 새롭게 성찰하도록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변화된 오늘의 조건 위에서 이제 저는 새로운 진보적 자유주의를 근원적으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우리사회는 그간 빈곤의 증가가 뚜렷했고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심화되어 왔습니다. 고용 불안이 심화되어 비정규직이 크게 늘어나고, 실업, 특히 청년실업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중산층은 축소되고 따라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소수의 (재벌)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성장 때문에 총량적 지표상에서 일정한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조적으로 이미 고용을 확대할 수 없는 산업구조와 고용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즉 성장과 분배, 성장과 복지, 그리고 성장과 고용이 병행할 수 없는 경제체제가 강화된 것입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은 이러한 경제체제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고, 산업간, 부문간, 기업의 규모간, 경제적 생산체제의 여러 수준에서의 양극화와, 그것과 병행해서 진행되어온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시킬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그 질서를 더 잘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국내경제질서의 개혁을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과거의 낡은 이념과 언어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경제적 이념을 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정책대안들과 프로그램들은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제일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경제 회복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민주세력의 정치적 실패와 양극화의 심화가 민심을 빼앗아버려 보수주의가 득세를 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서민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정치적으로 독선과 독주가 심해졌습니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보에 대한 요구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의 지배 속에 진보주의가 빠른 속도로 재출발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지식인은 “진보주의여 안녕!”을 고했지만, 보수주의가 최고의 번성을 누릴 때 우리사회의 깊은 내면에서 진정한 진보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태극기 속의 음양의 전환과도 같이.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적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흑인대통령이 탄생했고, 일본에서는 전후 60년 만에 민주당 진보정권이 탄생했습니다. 국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적극적 복지에 대한 요구가 미국과 일본의 정치를 바꾼 것입니다.

미국의 금융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고 세계 자본주의질서의 재편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습니다. 시장만능주의와 작은 정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맹신도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미국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부메랑 효과는 미국의 패권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G8으로 상징되는 강대국 카르텔도 G20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나. 문명사적 변화와 공동체의 가치

이러한 변화는 세계경제질서의 변화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문명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이 싹트고 있으며, 가치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성장주의가 동방 특유의 인문학적 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치, 인간과 물질,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체제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IT와 지식산업의 발달은 개인의 창의력과 개인적 노동이 각광받는 사회를 창출해냈습니다. 재택근무를 넘어서 스마트워크 혁명까지 일어나는 등 인간의 노동환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환경의 변화는 개인의 재발견과 개인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가치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의 재발견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개인적 생활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욕구를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 가치의 재발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는 2002 서울 월드컵에서만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일회성 현상이 아니라, 중요한 국가적 경기 때마다 나타나는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그만큼 큰 것입니다.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개인적 이해관계의 놀라운 응집은 우리사회의 공동체적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의 통합은 21세기적 인간의 재발견, 제2의 르네상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2의 르네상스와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문명은 기후변화라고 하는 지구 자연질서의 변화까지 겹쳐서, 정녕 새로운 가치체계의 정립에 대한 시대적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 진보의 가치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와 새로운 가치체계를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진보를 요구하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조류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시대가 진보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보수주의가 왜곡된 신자유주의의 철학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을 도구화 하는 것이 그 첫째 잘못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말하듯이 사람은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생명 그 자체로 최고 지선의 존재 가치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단순히 경제행위나 돈벌이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회제도나 가치의 관행은 당연히 저항을 받게 마련입니다.

노동의 가치와 자본의 가치 사이에서 자본의 가치만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그 둘째 잘못입니다. 노동자를 경쟁과 효율의 노예로 삼으면 당연히 저항에 부딪치게 됩니다. 인류의 노동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노동의 신성함을 믿는 사고체계야말로 인류발전, 보다 구체적으로는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적 조건에서도 분명한 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과 노동이 민주적으로 병립하고 공생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은, 성장-복지-고용이 지속적으로 병행 발전할 수 있는 한국민주주의의 방법론이라고 믿습니다.

개인주의를 절대화하는 사조가 그 셋째 잘못입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억압을 당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개인주의는 그 나름대로 철학적 정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탐욕을 방치하고 공동체의 삶을 외면할 때 그 결과는 인간성의 파괴와 파멸로 돌아옵니다. 개인은 이웃과 더불어 자유로울 때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보수주의의 오류와 횡포를 경험하면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의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최근 지향하고 있는 “가치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 중심 가치는 (1)사람 (2)행복 (3)공동체가 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진보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갈망하고 설계하는 우리사회의 변화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재발견을 통해서 제2의 르네상스를 구현하자는 것입니다. “제1의 르네상스”가 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회복이었다면, “제2의 르네상스”는 물질과 효율과 경쟁의 레바이아탄으로부터 인간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이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고 보편적 복지가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민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산참사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재개발은 지역 주민의 이익이 되도록 추진되어야 하며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에너지의 효율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판자촌을 무조건 때려부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의 삶의 지혜와 낭만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는 인(仁)한 생각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판자촌의 인간이 고층아파트군의 인간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판자촌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고 판자촌의 괴멸만을 생각하는 무자비한 변화는 진정한 문명의 진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명과 자연을 보호하는 것 또한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정책 차원이 아니라 21세기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주인이 되면서 또 행복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의 집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하고 구현하는 정신적 바탕이기도 합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의한 승자독식의 사회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이 모두 함께 잘사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공동체 사회는 우리사회의 전통일 뿐 아니라 자연상태에서의 인류의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복원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입니다.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통합과 화합이야말로 진보가 수행해야 할 진정한 역할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빈곤의 확대와 양극화의 심화 속에 출산율은 세계 최저, 자살율은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년 실업도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가정 파탄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회적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린이 성폭행과 청소년 범죄의 증가 등 사회적 불안도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좌절과 패배감이 사회를 뒤덮고 있으며 정치에 대한 불신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희망의 사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가치의 회복을 추구하는 사회적 배경입니다. 이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 진보의 책무입니다.

3. 3. 비전 :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 공동체
가. 국민생활우선의 정치


새로운 비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는 국민생활을 우선으로 하는 정치입니다.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는 정치의 우선과제입니다.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말한 동방 고유의 테제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와 농어민, 영세자영업자, 중소기업을 적극 보살펴 주는 역할이 정치의 본분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이미 잘사는 사람들과 대기업은 스스로의 힘으로 잘 뻗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그들을 귀찮게만 굴지 않으면 됩니다.

국민생활우선의 정치는 구체적인 국민생활의 문제에 관심을 갖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는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택, 교육, 의료, 일자리, 노후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대표적인 과제입니다.

무주택자들에게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주거공간을 공급하는 것은 국민생활정치의 기본입니다. 가난한 서민들의 고통과 사회적 차별은 바로 주택문제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사회적 생활의 수단일 뿐 아니라 삶의 가치 그 자체이고 복지의 핵심적 요소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사적능력이나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공동체에 필요한 인재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책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합니다. 수준 높은 공교육을 제공하여 사교육비의 멍에를 벗겨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보편적 의료서비스는 복지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의학과 과학의 비약적 발전은 사회적 자산입니다. 시장에서 구매능력을 가진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며, 공동체 전체의 의료서비스 질을 높이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고령사회에 대처하는 국가정책방향이 더 이상 고령자 계층의 복지라는 협소한 관점으로 접근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사회가 고령화된다는 것은, 세대간 경제적 재분배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출산문제를 개선해 사회적 재생산능력을 회복하는 문제, 청년층부터 노년기를 대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사회보장 인프라 구축, 중·장년층의 실업대책과 예방적 의료서비스정책… 이 모든 것이 함께 고려될 때 비로소 고령자복지는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국가경제를 운영함에 있어서 일자리는 모든 정책에 우선해야 합니다. 국가가 조금만 깊고 너그럽게 생각하면 좋은 일자리를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얼마든지 고안해낼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부를 타인들과 나누며 행복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기본생활의 영역 외에도 국민생활우선의 정치가 관심을 갖고 해답을 주어야 할 영역은 광범위합니다.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자연을 보호하고 생명 존중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도 새로운 사회의 요구입니다. 자연의 보호는 문명의 에너지 절감이라는 문제와 맞물리는 새로운 산업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보호와 경제적 이득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인류의 과학은 진보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범죄와 재해로부터 보호하여 안전한 생활을 보장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국가의 과제입니다.

국가를 외침으로부터 보호하고 국민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책무 중 으뜸가는 책무입니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가치는 무력을 증강해서 전쟁에 대비하기보다 평화 체제를 확립하여 전쟁의 조건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남북간에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구성하여 전쟁의 위협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나. 정의로운 복지사회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고 찾아가야 할 새로운 길은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 공동체”입니다.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 공동체”는 사람과 노동이 기본이 되는 국민공동체로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리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서민과 중산층의 희망이 복원되는 사회입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로서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할 것입니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무상급식 논의는 시혜적 복지,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의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존중한다는 정의의 기본 이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복지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물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보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이념만을 앞세우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국민은 소리만 높은 진보를 원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생활을 책임지고 삶의 질을 구체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의 진보를 국민은 원하고 있습니다.

다. 건전한 시장경제질서
복지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건전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이 요구됩니다. 시장경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체제입니다.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올바른 전체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어야 합니다. 시장경제가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만큼, 공정한 거래 질서는 시장경제의 생명과도 같은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시장경제가 승자독식의 불의(不義)한 사회를 만드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지배구조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중소하청업체를 보호하는 것은 경제정의 실현의 중요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대기업은 이제 하청업체와의 “나눔의 상생”을 보다 본질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사원주주제의 적극적인 도입과 확대를 통해 지배구조의 건전성과 경영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도 건강한 시장경제질서의 확립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성장동력의 보호육성은 복지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생명의 존엄성과 함께 가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인류적 관심은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굴과 육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녹색산업을 비롯한 신성장동력의 개발과 육성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진보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능한 진보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방임적 시장주의가 맹신적으로 신봉하는 “작은 정부”의 허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기는커녕 더욱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녹색산업을 비롯한 신성장동력의 육성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국가가 훨씬 효율적으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탐욕과 대기업의 횡포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국민의 삶을 유린할 때 이를 제재해야하는 국가의 역할도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자유방임주의적 시장논리에 따라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아직 있지만 이는 우선 현실적이질 않습니다. 이는 무지에서 나오는 위선일 뿐입니다. 사회적 강자를 위한 억지 논리이기도 합니다. 레이건 정부도 감세정책을 폈지만 결국 정부 재정적자만 산더미처럼 불려 놓았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작은 정부를 표방하고 정부부처 몇 개를 줄였지만 결국 정부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재정적자는 날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작은 정부”가 현실에 조응하지 못하는 정책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노력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영역이 점점 넓어짐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축소한 결과, 결국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과 국민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간섭은 오히려 늘어나고 민간 부문에 대한 권력의 위세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허위와 승자독식의 “작은 정부론”보다는 국가발전을 선도하고 국민권익을 보호하는 “적극적 정부”가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복지사회의 정부구조가 될 것입니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산되는데 결정적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세계화와 개방화는 세계경제질서의 기초가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세계화와 개방화의 압력을 거부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초래하는 양극화와 취약산업의 부작용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을 중시하고 약자의 편에 서는 정치의 입장에서, 세계화는 분명 경계의 대상입니다. 무엇보다 세계화 그 자체가 국가의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시대적 정황의 방편(方便)일 뿐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전체의 공존과 공영과 행복을 담보하는 세계화만이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올바른 세계화입니다.

라. 한반도 평화와 한민족 공동체

한반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화해 협력정책에 따라 긴장이 크게 완화되고 남북간의 경제협력도 커다란 진전을 보았습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성관광 등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멀지않은 미래에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형성해서 남북이 함께 번영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로 통일된 한민족 공동체의 꿈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남북대결정책 속에 긴장이 고조되고 교류협력은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경제공동체의 꿈은커녕 개성공단에 진출해 있는 일부 기업이 철수하는 등 남북경제협력이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쟁의 위협과 심리적 불안감만 증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공동체정신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 공동체의 그림을 그려나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평화를 원한다면 남과 북의 평화는 필수적 조건입니다. 따라서 평화와 통일은 둘이 아닙니다. 한반도 평화를 통해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통일은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달성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절망하고 포기할 일도 아니고, 성급하게 강제할 일도 아닙니다. 남북의 긴장이 가속화하고 대결상태가 심화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경제적 손실과 강국에로의 예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운(國運)을 주체적으로 운영해나간다는 원칙을 버리면 안됩니다. 따라서 남북문제는 항상 우리 스스로 이니시어티브를 장악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이 이니시어티브를 강국에게 위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예속은 북한을 타국에게로 예속시킬 뿐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의 홍구(鴻溝)를 더 깊게 파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진정한 동포애와 민족애로 북한을 대해야 합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인권상황에 대해서 따질 것은 따지고 대응할 것은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우리와 같이 대등한 위치에서 대결해야 할 상대인지를 우리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따뜻한 동포애와 북한 실정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남북관계를 설정하고 북한에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동포라는 애정, 우리 민족이라는 애정, 통일되면 한 나라이고 우리 땅이라는 애정을 남북관계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반도 공동체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새로운 문명이 동아시아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주축시대에 있어서 남북이 하나 된 한민족 공동체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마. 민주당과 민주진보세력

민주당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피폐해진 서민의 삶을 돌보아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후퇴한 민주주의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합니다. 파탄이 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평화체제를 확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830만이나 되도록 막지 못했는지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영세자영업자 편을 자처하는 우리 민주당은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서는 대형슈퍼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서민들 아파트값, 전세값을 안정시킬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할 정책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 민주당은 민주개혁진보 세력을 대표해서 이러한 국민생활의 문제에 대답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을 정치활동의 가장 우선에 두는 국민생활우선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민주진보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을 설파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펴는 정치가 국민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합니다.

민주당은 민주진보세력이 국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치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진보세력의 넓은 고민과 실천을 담아낼 수 있는 큰 솥이 되어야 합니다. 민주당은 민주진보세력의 대통합의 선두에 서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세력이 대통합되는 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민주당은 이 땅의 민주세력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가져야 합니다.

바. 세종대왕 리더십

이러한 대통합의 정치는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통합니다. 세종대왕의 선정은 오직 백성을 기준으로 나라를 다스린 데서 나왔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의 불편을 생각해서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왕족과 사대부를 기준으로 했다면 한글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농사짓는 농민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혼천의를 만들고 농사직설을 펴냈습니다. 약도 중국에 없지만 우리 강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약(鄕藥)을 개발해냈습니다. 말로만 백성을 어여삐 여긴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글자를 만들고, 기구를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책을 펴냈습니다. 세종대왕은 진실로 실사구시의 살아있는 실천가였습니다.

오직 국민만을 생각하고 실질적으로 국민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사구시의 정치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국민이 기준이 되는 정치가 진보의 길입니다. 국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능한 정치가 진보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의 이해를 위한 정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국민을 크게 하나로 묶는 대통합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심초사했던 과정이 세종대왕 치세의 역정이었습니다.

4. 4. 결의 :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가. ‘화합’과 ‘품격’의 정치

한국의 정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내라는 장(場)의 논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국내의 작은 문제라도 항상 세계라는 글로벌 퍼스펙티브 속에서 조망되어야 합니다. 21세기가 문명의 주축의 대이동 시기라는 것은 국내외 석학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중국문제만 해도 과거에는 중국분열론과 중국위협론을 말했으나 지금은 “중국모델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이나 공산당전정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과감한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하나의 새로운 정치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논의입니다. 산업사회의 발달은 18~19세기에 걸쳐서 유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주축은 미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미국문명은 어디까지나 산업사회의 모든 구조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킨 축이지 근원적으로 질적인 변화를 수반한 새로운 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주축이 중국으로 또다시 이동한다고 할 때에 중국문명은 단순히 이전의 구미산업사회의 효율을 개혁하는 수준의 문명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류의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근원적으로 산업사회의 효율이나 경쟁의 개념과는 다른 인문과 화해와 건강과 조화의 인간적 문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질적으로 변화된 중국문명의 리더십을 선도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새로운 문명이 우리 한국문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북이 통일된다 하는 것은 그 통일을 통하여 세계질서를 개편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문의 이상과 도덕성을 구현할 때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문명충돌의 새로운 국면 속에서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모순(더 중요한 모순)과 주요모순(덜 중요한 모순)은 변증법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진보를 말한다 할지라도 그 논리의 근거를 제시하는 모순관계는 이미 이러한 글로벌 퍼스펙티브 속에서 수시로 유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보”라는 고정태를 이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고정된 개념 속의 진보만으로는 오히려 한국적 현실 속에서는 저질의, 수준도 안되는 엉터리 “보수”만을 조장하는 레토릭에 그치고 말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한국의 진보가 가야할 방향이 서구 공동체의 정치궤적을 따라 출몰했던 특정 정책과 노선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동의 번영을 가능토록 하는 “화합”의 문제이며, 또 그 화합을 가능케 하는 “품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품격”이란 정치적 리더가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의 관점을 수용하고, 가급적이면 다양한 주장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고 설득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동방의 고전들이 말하는 “호학”(好學)이나 “무소유”(無所有)의 덕성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사소한 욕망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배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품격 높은 대화합의 정치를 이룩해내고야 말겠습니다.

다. 새로운 다짐

우리는 분열되어가는 대한민국을,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 공동체에 희망을 함께 복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서있는 이곳 대한민국은 우리의 어버이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소중한 꿈을 영글어갈 영원한 터전입니다.

우리의 기약은, 우리가 살 길은 더 나은 대한민국 공동체를 위해 오직 함께 전진하는 것입니다. 뿔뿔이 나뉘어서, 서로를 밟고 나가면서 이뤄내는 전진은 환상일 뿐입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이 되는 천박한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평범한 국민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불초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대항합시다. 모두 함께 일어나 아이 없는 사회를 아이 낳는 사회, 희망의 사회로 바꿉시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그것은 열심히 땀흘리며 노력한 그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리는 서민과 중산층의 희망의 복원, 행복의 복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서겠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부자만이 행복한 나라가 아닙니다. 정정당당한 사회, 서로의 꿈을 존중하는 사회가 우리가 만들 위대한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그 첫 발은 바로 대한민국의 민주세력이 더 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 세력”을 하나로 모으겠습니다. 저는 2년 전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새로운 진보”로 제시했습니다. 새로운 진보는 상호부정과 파괴를 통해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새로운 진보는 “더 큰 하나”가 될 때 가능합니다. 이제 민주세력과 개혁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이 더 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와 서로의 비전을 존중하되 다름보다는 같음에 주목하고 함께 힘을 합쳐야 합니다. 새로운 진보는 하나가 되어 더 커질 때만이 새로워짐을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 국민이 주인이 되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국민과 함께, 국민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누고자 합니다. 민심의 강줄기를 따라 “함께 잘 사는 나라”라는 큰 바다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민심대장정의 정신으로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 어떤 가치와 이념이라도 우리가 함께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새로운 장정은 저 혼자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 할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복원하는 대장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서로를 진실하게 만드는 마음마다 간직하고 있는 고귀한 사랑을 살려냅시다. 우리 스스로 위대한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키웁시다.

대한민국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시간의 길이조차 유구한 역사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 공동체의 행복이어야 합니다.

오늘 광복절, 이역만리 저 거친 광야에서 풍찬노숙하며 오직 조국의 광복을 향해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던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국민대중에게 길을 물어 가겠습니다.

이 땅의 민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15일 정든 춘천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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