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그 어느 날의 슬픈 회상  뉴스검색 제공 제외
80년 광주의 봄은 대학가에 먼저 찾아왔다.

새 학기 들어 전남대를 비롯한 이 지역 대학생들은 군사조직에 가까운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학생들이 직접 선출한 총학생회로 바꾸었다. 그리고 갖가지 교내 집회와 토론을 조직하여 학원민주화를 추진하였다. 먼저 정보부의 손발 노릇을 해 온 어용교수를 성토하고 퇴진을 압박하는 등 유신독재 청산운동을 주도하였다. 학생들의 동참 열기는 날로 뜨거워 졌으나 눈 딱 감고 버티는 스승들을 폭력으로 들어낼 수는 없었다.

14일, '민주화 성회'

5월 들어 학내의 민주화 열기는 마침내 광주시민 전남도민 속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14일엔 전남대학생들이 전남도청 광장으로 진출하여 ‘민주화 성회’라는 이름으로 8천 명이나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3일간 열기 시작했다. 도청 앞 분수대는 총학생회가 마련한 시민 토론장이 되었다. 2백 명이나 되는 교수들이 함께 한 첫날의 집회에는 시민도 여럿이 동참하였으나 거리행진에서는 시민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음 날엔 더 많은 교수와 조선대를 비롯한 다른 여러 대학의 학생 및 시민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그것으로 보아 시민들은 외면하거나 냉담했던 것이 아니라 아직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라고 그 자리를 함께 했던 교수들이 전한다.

나는 그때 광주에 있는 전남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 생활지도부장(학생주임)을 맡고 있었다. 이 학교는 그해 봄에 고등학교로서는 처음으로 전교생이 직접선거하여 총학생회를 세웠다. 이미 70년대 말에 교복을 일반 신사복 모양으로, 모자도 일제 순사 모자와 비슷하다며 바꿔버리기도 했다. 강요한 교장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그 독한 유신 치하에서 “오늘도 창의와 협동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며 ‘인간 존중’과 ‘주인 되는 삶’을 생활목표 교육목표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당국으로부터 미운 털 많이 박혔고 주위로부터 눈총도 적잖았던 터, 나의 관심은 당연히 시국 문제에 깊이 집중해 있었다.

첫 민주화 성회가 있기 직전, 나는 학생회 간부이며 2학년 반장인 강 군과 수돗가에서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었다. 학력향상 및 생활지도 문제와 함께 서울의 봄, 광주의 봄을 얘기 하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동강났다. “군은 필시 개입하고 말거다”라고 했더니 강 군은 아니라고 “군은 개입 못 한다”고 부정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이제 군은 절대로 그런 짓을 못한다고 형님들이 그랬어요”라고 답했다. “어떤 형님들이냐”고 물었더니 “민주화운동을 추진하고 계시는 전남대학교 선배님들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이쿠!” 하면서 맨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군부가 독아를 감춘 뱀처럼 소리 없이 기어들고 있는지 모르는데 이 아름다운 열혈청춘들의 확신은 한사코 아니라고만 하다니... 조금은 알고 있었던 5년 전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민주 인사 대학살, 기관단총 내갈기는 소리, 핏방울 뿌리며 갈기갈기 찢어지는 꽃잎, ‘아이고 우리 새끼 다 죽네’ 울부짖는 소리, 환청 환시 환각이 한동안 나를 엄습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땅바닥에 퍼질러 앉았다가 정신 차려 일어나보니 나 혼자 서 있었다.

신군부

대수롭지 않은 얘기 끝에 나는 왜 그토록 황당하고 돌발적인 이상행동을 하였을까? 거기엔 다음 같은 까닭이 있었다.

하나,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 존 아담스 위컴은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 남아메리카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미국사를 전공한 어느 친구에게서 80년 초에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70년대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군부가 자행한 ‘추악한 전쟁’의 배후에 그가 있었다는 말이다. 한국군의 작전지휘통제권을 쥐고 있던 그가 한국 사람을 가리켜 ‘들쥐’라 했던 것을 세상이 다 안다. 그는 전두환의 집권 가능성을 묻는 미국 기자 질문에 “한국 사람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권력을 잡던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지 않은 시스템”이라고 공개 답변한 사람이다.

하나, 그와 더불어 미국의 실력자들이 “3김 가운데 김종필은 부패했고 김영삼은 무능하고 김대중은 과격해서 곤란하다”고 한 말 뜻은? 박정희가 없어진 한국 정치판에 3김 아닌 새 실력자를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는 것 역시 천하가 다 안다.

하나, 5월 10일 무렵 서부전선 1사단(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임부대) 경계지역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졌다는 기사가 떴다. 12일에는 전두환이 제시한 북한의 남침 첩보를 다루기 위해 안보회의가 열렸다. 북풍, 총풍으로 시국혼란을 조작한다는 것을 반사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하나, 그러자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황급히 동교동(김대중)과 상도동(김영삼) 및 청파동(김종필)을 돌아다닌 기사가 신문에 났다.

하나, 유신독재의 정치적 아들을 자임하며 박정희의 복수를 공개적으로 맹세하던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투복에 권총 차고 TV 앞에 나와 10.26 사태의 중간수사발표를 하던 머리 벗겨진 육군 소장의 섬뜩한 풍모, 12.12 군사반란을 성공하여 계급과 무관하게 한국 군부를 완전 장악하고 허울뿐인 대통령 최규하의 모가지를 쥔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전두환 그리고 그 휘하의 신군부...

이렇게 단 한 가지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것들이 다섯 가지나 됐다. 이 다섯을 한 데 모았더니 끔찍한 상황이 그림 그려지는데...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런 힘도 재주도 없는 일개 고등학교 생활지도 주임교사는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제자 앞에서 망신살만 뻗치고 말았던 것인데 그 날 그 망신이 능력 없이 보호본능만 작동하는 나의 이후 반평생을 결정지었다.

16일, '마지막 횃불민주성회'

16일, 마지막 ‘횃불민주성회’가 오후 6시에 열리는 날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전교생 거의 전부가 집회 전인 한낮부터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앞서 2학년 간부 몇은 틈틈이 전남대를 찾아가서 민주화 열정에 불타는 선배들 활동을 보고 토론도 가졌던 터였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교외 진출을 말렸고 나는 즉각 앞을 가로막아 나섰다. 비상계엄하의 ‘시계 제로’ 상황에서 아이들을 저대로 두면 살쾡이 앞에 병아리 풀어놓는 셈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또 학부모나 일반 시민들도 나무랄 것이고 민주화 운동 선배들에게 오히려 누를 끼치게 된다고 설득했다. 도서관에는 뜻 아닌 농성사태가 벌어졌고 사실 나는 그렇게 유도했다. 하루해가 저물도록 실랑이한 끝에 오후 5시, 일과 종료 시간이 되자마자 전교생을 귀가 시켰다. 3학년을 제외한 전교생 거의가 둑 터진 강물처럼 도청으로 흘렀고, 선생님 대부분도 끈 달린 연처럼 함께 달려갔다.

분수대 광장은 사람 숲이었다. 토론은 자유롭고 질서 정연했다. 비상계엄은 왜 해제되어야 하는지, 유신독재는 왜 철폐되어야 하는지, 민주화일정은 왜 공표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우리 서민의 삶과 어떤 관계인지를 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농사군 장사군 월급쟁이 날품팔이 청년 학생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저 분수대에 스스로 올라가 제 의견을 내놓고 토론하였다. 그런 다음 대중의 합의에 따라 결론을 내리곤 하였는데. 마지막으로 당국에 ‘비상계엄 해제, 민주화 일정 공표, 유신잔재 청산’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태극기를 앞세운 횃불 시가행진을 벌였는데 시청과 광주역을 돌아 제자리에 와 해산할 때까지 돌멩이 하나, 유리창 한 장, 가로수 한 잎도 상하지 않았다.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이보다 더 완벽한 직접민주주의 산실이자 학습장이 또 어디 있었을까?

18일, '계엄군 진입'

고요한 일상의 토요일을 보내고 맞은 일요일, 18일 새벽에 울린 전화 벨소리, 섬뜩한 느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공수특전대가 학내로 진입 점령했다”는 전남대 학생처 부처장이었던 막역지우 정 교수의 다급한 목소리, 아 무서운 것이 오고 말았다. 학생지도부 선생님들께 급히 전화하고 학교로 나섰다. 당시 교외에 살던 터라 버스를 타면 전남대 후문 옆을 잠깐 지나게 되는데 얼룩무늬 무장군인들이 남학생들을 팬티만 입힌 채 꿇려 놓거나 원산폭격 시키는 몰골이 차창으로 보였다.

공식 기록에는 18일 아침에 등교하려는 학생과 막으려는 계엄군의 실랑이 끝에 계엄군의 폭력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17일 24시 즉 18일 0시에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 특수부대가 1개 여단씩 진입한 즉시 가혹행위는 시작되었다. 실험실 연구실 도서관 가리지 않고 특수진압봉, 착검한 M16, 군화발 등으로 이유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무지하게 폭행당한 사람들... 정교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아무리 사람 목숨이 모질다지만 그렇게 맞고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계엄군 공수부대는 18일 0시부터 잔혹행위를 개시하였던 것이다. 일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철저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특전부대의 실력행사를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진실은 진실 그대로다.

19일, '금남로'

다음 날 월요일, 19일 아침에 등교한 학생들은 “북한 공산군이 와서 시민들을 찌르고 패 죽이는 것 아니냐”며 반 미친 듯 대들었다. 달래어 귀가시켰지만 애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불안한 우리들은 무엇에 끌리듯 시내로 나갔다. 석양 무렵 충장로 5가에서 공수특전대원이 젊은이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다. 대학생만 보면 절대 그대로 두지 않은 저들은 시신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한다. 아기 업은 어느 할머니가 “아이고매 우리 새끼들 다 죽이네!” 소리치자 백구두에 흰 양복 입은 어느 멋쟁이 할아버지가 “야, 젊은 놈들 빨리 피해! 살 만큼 산 노친네들이 나설란다” 고함을 질러댔다. 시민들은 대학생들 피신시키기에 바빴다. 내 보기에 광주시민은 그와 같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금남로 4거리에 이르자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시민 수백 명이 도청 정문에 진지를 둔 군대를 향해 고함지르다가 계엄군이 쫓아오면 달아나고 돌아서면 달려 나가 돌팔매질을 해댔다.

20일, '저항의 불길'

20일부터 날마다 학교 아닌 시내로 출근하였다. 민주화 열망 때문이 아니라 나라도 옆에 있으면 우리 아이들이 무사할 것 같은 착각 때문이었다. 구두끈 졸라매고 용약 출진하듯 나가는 모양새야 좋았지만 현장에서는 영 아니었다. 착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쏘고 휘두르며 달려드는 계엄군과 마주치면 달아나기에 바빴다. 남의 점포 문을 밀치거나 담 뛰어 넘는 나의 등줄기로 흐르는 공포와 치욕감, 분노와 적개심은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민의 자생적 저항은 들불이 되어 이제는 아침부터 타올랐다. 그 가운데 버스 택시 운전기사들이 특별했다. 대학생을 숨겨주고 실어 나른다고 폭행당했다. 마침내 사발통문 돌린 기사들이 4시에 무등경기장 정문에 모여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5시에 도청 앞 계엄군 진지를 향해 돌진했다. 그 일로 많은 운수노동자가 희생되었다. 청년학도와 노동자와 시민대중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군의 폭력에 비례하여 시민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저녁 11시 경에 광주역의 첫 총격으로 한 젊은이가 숨졌다. 계엄당국은 남파 간첩의 철도 폭파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8년 뒤 여소야대 국회청문회에 나온 당시의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윤흥정 중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대간첩작전 전문가의 견해임을 전제하면서 “남파공작원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예를 들자면 우물이나 수도에 독을 독약을 풀거나 대중교통 철도를 폭파하거나 대중에게 총격 난사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1일, '도청앞 일제사격'

21일, 오전부터 금남로는 만원버스처럼 시민들로 꽉 차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연탄집게 후라이팬 각목 등을 들고 나온 사람도 곳곳에서 보였다. 세계 최강의 살인병기 특수부대 앞에서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민중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민주화 일정 공표’ 등을 여기저기서 외쳐댔다. 정 교수와 함께 금남로에서 전남대로 이동하면서 수 없이 많은 차량 시위행렬을 만났다. 차를 세우고 간곡히 당부했다. “이대로는 전멸합니다. 자위력 없인 다 죽습니다... 저들은 일당백의 살인병기 특공대입니다. 절대로 맞붙지 말아야 합니다. 쫓아오면 달아나고 멈추면 돌아서서 쫓고, 군대와는 일정간격을 유지합시다. 머지않아 전 국민이 범죄 만행을 알게 됩니다. 전 국민과 함께하는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허망한 소리가 되었다.

아! 21일 정오, 도청 앞 계엄군 진지로부터 일제사격이 퍼부어졌다. 제 부모 제 형제 수 만 군중의 심장을 향한 집단발포라니, 누굴 죽이라고 쥐어준 총인가, 무엇하라고 기른 군댄가! 아~아 총 맞아 산사태 나듯, 홍수에 제방 무너지듯, 장작더미 허물어지듯, 핏물이 강물 된 도청 앞 금남로!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인간사냥 살육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의 통곡시는 거기서 나왔다.

학생지도부의 내 동료이자 후배 교사인 김 선생의 집은 전남대 정문 앞 동네였다. 학생들 걱정에 시내로 나간 남편을 마중하러 대문 밖에 나선 그의 부인 초미애 님. 시신을 끌고 가는 계엄군을 향해 “(시신을) 놓고 가라” 외치는 동네 아주머니를 향해 갈긴 총알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친정어머니, 쓰러진 딸을 보듬어 일으키려는데, 뱃속의 아기는 살겠다고 펄쩍 펄쩍 뛰더란다. 어머니는 기절하고 말았다. 망월동 구 묘역 분향대 바로 옆에는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남편이 새겨준 빗돌과 함께 아름다운 결혼사진이 함께 있다. 계엄당국이 엄중 처벌하던 유언비어는 다 이렇게 진실에서 나왔다.

마침내 무장한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냈으나 광주는 완전 포위되었다. 새 한 마리 날아갈 수 없고 개미 한 마리 기어들어올 수 없었다. 그 안에서 봉지쌀 나눠먹고 담배개피 나눠 피웠다. 은행 한개, 정부미 식량창고 하나도 털리지 않았고 그 흔하던 강도나 폭행도 없었다.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이 시찰차 왔다 가면서 낸 방송 담화 가운데 “이상한 폭도들!”이라고 들은 대목이 잊히질 않는다.

22일, '미국의 정체'

22일, 해방광주 금남로에 가득한 시민들은 “우방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부산에 입항 했답니다. 머잖아 저 악귀들을 징치하고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 힘냅시다!”며 서로 격려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 날 미국정부의 안보회의는 진압군 투입을 결정했다. 항공모함과 전투기 전진배치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 우리는 너무 착해서 슬픈 백성인가!

돌이켜보면 그러나, 1만년 우리 역사에서 어리숙한 백성들이 국가폭력에 맞서 무력항쟁을 통해 끝내 승리를 일궈낸 것은 광주항쟁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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