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 발표할때 언론은 뭘 했나… 투사회보로 본 5.18 뉴스검색 제공제외

1980년 5월 광주에 언론은 없었다. 언론은 계엄사령부의 보도자료를 받아쓰면서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면서도 계엄군의 발포 사실은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5월22일 “광주지역 소요가 악화된 원인은 전국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데 그 원인이 있다”고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언론은 시민군의 총기 탈취와 방화 등 과격시위에만 초점을 맞췄다. 경찰과 군인들의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7일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철저한 보도통제의 결과였지만 방송의 경우는 왜곡이 더욱 심했다. 북한군의 무력 훈련 장면을 반복해서 비춰줬고 피 흘리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무장시위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던 이 끔찍한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7년에서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10·26 사태 이후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다.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는 검열관들이 ‘검열 필‘이라는 도장을 대장에 찍어줘야 인쇄를 할 수 있었고 7개월 가까이 검열이 계속되면서 자기검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5월16일 배포된 보도지침에는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식의 기사는 모두 불가”, “동료가 부상하자 경찰도 흥분, 학생들과 육탄전에 가까운 근접전투 벌였다 등은 불가” 등의 원칙이 적시돼 있다.

▲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제작됐던 투사회보.
그해 5월 광주에서 언론의 역할을 대신했던 건 시민들이 만든 ‘투사회보’와 ‘민주시민회보’였다. 투사회보는 광주 서구 광천동에 위치한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만든 B5 용지 1장짜리 유인물이었다. 21일 1호가 발간돼 25일 8호까지 발간됐고 ‘해방광주’ 이후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9호와 10호까지 발간됐고 11호는 배포되기 전에 전량 압수됐다. 투사회보는 5천부, 민주시민회보는 1만5천부 정도가 인쇄됐다.

투사회보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피끓는 감정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21일 발간된 1호에는 “놈들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면서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무기를 제작하라” 등의 행동강령과 함께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는 등의 과격한 문구가 등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격한 선동보다는 조금씩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23일 발간된 5호에서는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전두환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민주 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구국 민주 과도정부를 즉각 구성하라” 등의 정치적인 구호가 등장한다. 24일 발간된 6호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다”,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는 행동강령도 적시돼 있다.

주류 언론이 철저하게 광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투사회보는 유일한 신문의 역할을 했다.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투사회보 배포와 함께 취재활동을 병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호에는 “현재 병원에서 확인된 시체가 102명, 변두리에 버려진 시체, 군인들이 실어 간 시체가 550명, 합계 6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중상자 500여명, 경상자를 포함, 총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들은 투사회보를 통해 계엄령을 철폐할 것,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할 것, 구속 중인 학생과 시민, 민주인사들을 즉시 석방하고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면서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투쟁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투사회보는 이들이 체제전복을 노리는 무장폭도가 아니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다.

24일 배포된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에서는 고립된 광주 시민들의 절박함이 드러난다. “80만 광주시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오, 처절하고 참혹함이여. 인간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억누를 길 없는 울분으로 목이 메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메임은 또한 치솟아오르는 분노와 의기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이 메이도록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25일 배포된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에서는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해 주시고, 사과와 용서를 청해 주시옵고, 이미 약속하셨지만, 모든 피해에 대하여 정부가 보상하고, 어떤 보복조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옵기 피눈물을 삼키면서 간곡히 간언드린다”고 밝히고 있다. 그날 도청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저항하자는 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왼쪽부터) 조선일보 1980년 5월22일자, 동아일보 5월22일자.
그리고 26일 저녁 150여명이 도청에 남아 계엄군에 맞선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도청을 넘겨준다는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누군가는 남아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고 죽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구두닦이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 등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밑바닥 민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청 사수파’였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고 있었던 윤상원 열사는 25일 아침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들불야학 강학으로 투사회보의 편집장 역할을 맡았던 윤상원은 5·18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많지 않은 엘리트 가운데 한명이었다.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윤상원의 인터뷰는 외신을 타고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투사회보는 국내 최초의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였을지도 모른다. 주류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를 일삼고 있는 가운데 이에 분노하는 독자들이 직접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고 진실을 고발하고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고 행동을 끌어내는 투사회보의 계보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와이브로와 디지털 카메라로 무장한 수많은 시민기자들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군화발’과 ‘물대포’ 동영상 등이 모두 시민기자들의 특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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