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영원한 스승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리움과 함께 추억이 밀려왔다. 가까이서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분들이나 함께 수행하고 활동했던 분들의 추억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추억이겠지만...

1970년대에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인권을 유린하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신 유일한 스님을 불자로서 정말 존경했다. 1980년 5월 17일 광주 시민회관에서 열린 불교 강연회에서 “나라가 쇠망하지 않으려면 첫째, 자주 모여 나라 일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하시던 스님의 간곡한 말씀은 30년이 다 된 지금도 떠오른다.

그 당시 12.12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4월에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차지하는 등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5월 15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군부의 동향에 겁을 먹고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중단해 버렸다.

그러나 광주는 5월 16일 밤까지도 투쟁하였고, 나도 그에 참여하면서 불자들의 참여를 촉구하고자 17일의 법정 스님 강연회에서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스님이 강연을 마치고 떠나실 때, 그 유인물을 스님께 전해 드리며 배웅했다. 그러고 나서 곧 5.18 광주학살을 겪었다. 광주학살은 스님이 인용하신 부처님 말씀-‘나라가 쇠망하지 않는 법’을 어기고 집회의 자유를 짓밟으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잔악무도한 학살극이었다.

법정 스님을 다시 뵌 것은 5.18민중항쟁으로부터 두세 해가 지난 뒤였다. 나는 5월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마음으로 독송하며 번역한 유마경 노트를 가지고 불일암에 계신 스님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스님께 그것을 내밀며, 보시고 꾸짖어달라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유심히 보시더니 애썼다고 하시며, 번역문투를 더 매끄러운 우리말로 다듬어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뒤로 현장생활에 몰두하느라 한 동안 스님을 다시 뵙지 못한 채, ‘예전과는 달리 군부독재에 대하여 왜 침묵하시는가’ 하고 은근히 원망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수많은 글과 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삶을 일깨워 주고 계셨지만, 솔직히 나는 스님에 대해 관심이 멀어졌다. 80년대 내내 나의 눈에는,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군부독재에 저항하신 지선 스님, 진관 스님, 성연 스님, 법성 스님만 보였다.

어리석게도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법정 스님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몇 번이나 사양하시던 끝에 요정을 보시받아 이루어진 길상사의 주지도 맡지 않으시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고요히 은거하시는 모습에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수행자의 진면목을 보았다.

천성산의 자연을 파괴하고 뭇 생명을 위협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에 맞서 지율 스님이 외로운 싸움을 하실 때, 중동의 패권과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자행할 때, 종단은 침묵했지만 법정 스님은 매섭게 질타하셨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모임을 만들어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일을 꾸준히 실천해 오신 스님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자후였다. 적은 것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이기적 탐욕으로 남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마저 위협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신 스님의 말씀은 나만 기억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때부터 다시 스님의 책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영원한 고전이 된 ‘무소유’부터 ‘아름다운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탐욕이 목끝까지 찬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같은 스님의 책은 나의 어둠도 밝혀 주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겨놓으신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와 ‘진리의 말씀(법구경)’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일깨워 주고 있고, 요즘도 나는 그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문빈정사 벽보판에 하나하나 옮기고 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시는 순간까지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하셨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하신 스님의 유언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범종소리처럼 ‘텅 빈 충만’의 울림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스님은 그 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시며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셨다는데, 스님의 책을 통해서나마 스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으로 눈이 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비움과 나눔을 일깨우는 스님의 책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책인가!

‘무소유’를 비롯한 스님의 책을 즐겨 본다는 대통령이 대운하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사대 강의 바닥을 파며 삽질을 하는 이 시대, 무수한 생명이 살상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이른바 ‘국익’을 위하여 주저없이 파병을 하는 이 시대, 그러한 무모한 짓에도 저항할 줄 모르고 제 이익만 챙기는 데 눈이 먼 이 탐욕스러운 시대에 대해 역설적으로 던지신 마지막 질타는 아닐까. ‘잘 설해진 말도 행하지 않으면 / 결실이 없어 소용이 없다.’고 한 법구경의 말씀이 자꾸만 떠오른다.

너도나도 모두들 스님을 추모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지만, 나는 부디 극락에 머물지 마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시기를 기원해 본다. 스님께서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과 함께 그토록 갈구하셨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국익’과 ‘편리’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인 환경파괴가 자행되는 이 세상에, 적은 것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너나없이 탐욕에 눈이 먼 이 세상에 스님 같은 분이 꼭 계셔야겠기에.

그리고 다비식보다는 스님 계시던 불일암에 더 가보고 싶다. 언젠가 거기 갔을 때 그랬듯이 이제 빈 의자만 나를 반기겠지. 그래도 거기 잠시 걸터앉아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도 다시금 들여다봐야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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