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유럽 빈국들의 재정위기가 선진국에도 불길한 이유 <뉴스 검색 제공 제외>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는 아무도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다소 황당한 설정 같지만, 우리는 현실에서도 종종 이러한 상상의 세계에 사로잡힌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규제를 외치면 사람들은 이를 미국 정치권과 월가의 대립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요즈음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우려가 남유럽의 재정위기라고 세계적인 언론들이 보도하면, 또 우리는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의 주요 행위자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현실의 '글로벌 경제'는 로맨틱하지가 않다. 한 나라의 경제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조차 진실이나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데, 하물며 국제자본들과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부들의 각축장인 글로벌 경제는 또 어떠랴.

세계 정부를 자임하는 미국을 보더라도 재무장관은 곧 월가가 파견하는 이해관계자에 다름아니다. 골드만삭스 회장을 역임한 로버트 루빈과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은 표면에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 '불경한 삼위일체'의 저자 리처드 피트는 "미 재무부, IMF,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하버드 대학교의 지적인 분점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제도적 복합체"인 '워싱턴-월스트리트 동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 특히 투자은행의 인사들"이라고 지적한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

최근 미 하원에서는 가이트너 재무장관과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 등을 상대로 '백도어(뒷문) 구제금융' 청문회가 진행중이다. 서브프라임 위기의 와중에도 AIG에 투입된 18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이 골드만삭스 등 특정 금융기관들의 잇속을 차리는데 쓰인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가이트너가 총재로 있던 뉴욕연방제도은행은 AIG에 거래내역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2008년 리먼 파산 전후로 투자은행들의 구제와 인수·합병을 주도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워싱턴과 월가를 연결하는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가이트너(당시 국제 금융담당 차관보)는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함께 아시아 금융위기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임창렬 부총리를 만나 '한국이 금융위기를 넘기려면 IMF의 자금지원을 받는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뜻을 전달한 것이 이 가이트너다. IMF 협상 수석대표였던 정덕구(현 니어재단 이사장)씨에 따르면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 수상에게 공식서한을 보내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생기더라도 양국 간 해결 방식을 취하지 말고 IMF를 통해 지원받도록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사카키바라 전 일본 대장성 차관은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과 같은 다른 지원방안들이 미국에 의해 차단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미국은 IMF 체제로의 편입을 강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실물 자산들을 헐값에 인수하고 자본시장 개방, 노동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등 국제자본이 원하는 정책들을 추구한 것이다. 동아시아 위기가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는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가 조장되었다는 것, 또한 위기 이후 국제자본들과 이들을 대표하는 각국 정부가 이윤추구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글로벌 경제가 하나의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렇다.

베이컨 파티는 없다

2008년에 시작된 위기의 현주소는 재정위기다. 최근에는 세계경제의 취약한 고리로 남유럽이 떠오르면서 국제 금융시장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PIIGS(포루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로 대표되는 남유럽 국가들은 내수가 취약한데다 취약한 경제력에도 자본시장 개방도가 높아 약삭빠른 국제투기자본들의 타깃이 되었다.

전세계의 언론들 특히 미국의 언론들은 이 기회를 틈타 친자본적인 이념을 퍼뜨리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PIGS(포루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를 살찐 돼지에 비유하며,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 그리고 안정된 복지제도를 비난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유로권의 남유럽 익스포져 규모. ⓒ 하이투자증권

만일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처럼 제한된 영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이들의 위기는 글로벌 경제에 오히려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빚잔치를 즐기기에는 현재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유로존의 익스포저 규모가 너무 크다. 부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리스에 대한 위험노출액은 2천 3백억달러 규모에 불과하나 아일랜드는 6천 5백억달러, 스페인은 8천 5백억 달러, 이탈리아는 1조 달러를 넘는다. 이들 3개국만 해도 글로벌 위기 이후 각국이 쏟아낸 경기부양책의 총규모인 2조 달러(IMF)를 상회한다. 게다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글로벌 경제의 최대 시한폭탄으로 꼽힌 게 동유럽이었다는 점에서, 남유럽 위기의 심화는 즉시 유로권 전체로 옮겨붙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 경제의 진짜 시스템리스크, 재정위기

무엇보다 남유럽의 재정위기는 오늘날의 주요 선진국들이 당면한 재정위기의 그림자에 다름아니다. 실상 미국이나 영국, 일본의 상황도 남유럽과 매한가지여서 세계경제에 유례없는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GDP 대비 재정적자로 따지자면 미국과 일본, 영국이 이탈리아보다 많다. 국가부채 수준 역시도 이들 3국이 공히 스페인보다 높다. 세계 최대의 채권투자기관인 핌코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빌 그로스는 올해 2월의 투자전망보고서에서 미국, 영국, 일본과 남유럽 위기의 중심에 있는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등에 대한 정밀 조사 결과를 밝혔다. 그는 미국과 영국, 일본 역시도 "과도하게 높은 공공 부채로 인해 느려진 경제 성장에 가장 취약한 나라들을 설명해주는 '불의 고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을 "거대한 적자와 폭발하는 복지"로, 일본을 "노화하는 인구와 외부 차입의 필요"로, 특히 영국을 절대로 피해야 할 국가로 꼽으며 "영국의 국채는 니트로글리세린의 침대위에 놓여있다"고 묘사했다.

▲ 핌코가 작성한 '불의 고리'(수직축이 재정적자, 수평축이 국가부채) ⓒ PIMCO

핌코의 진단은 이른바 '안전자산'이라는 선진국 국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핌코의 토탈리턴펀즈는 미 국채의 보유 비중을 지난해 10월 63%에서 12월에는 32%로 축소했다. 미국의 최대 채권자인 중국이 지난해 말 미 국채를 대량 매도하여 일본에 1위 자리를 내줬다는 재무부발 소식도 미묘한 분위기를 낳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9월 버냉키의 연임을 축하하는 서신을 통해 "올해 연준이 직접적으로 빚을 화폐화하며 미국 재부부 채권을 사들이기로 결정을 우려한다"며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스의 위기는 숨겨진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규모가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선진국들은 시가평가제 완화 등을 통해 부실 규모를 감추고 있다. 그리스의 위기가 남유럽 전체의 위기로 확산된 것은 이달초 포르투갈이 국채 발행에 실패하면서다. 미국은 정부가 찍어낸 국채를 연방준비은행이 찍어낸 돈으로 사들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 채널인 CNBC는 지난해 발행된 미국 재무부 채권의 80%를 연방준비은행이 사들였다고 최근 보도했다. 소위 안전자산으로 통하며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미 국채는, 이같은 '사기'가 아니라면 이미 폭락을 거듭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양적완화정책을 사용하는 주요국들에 공통된 문제다.

남유럽 국가들은 이들 3국처럼 양적완화정책(사실은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어 시뇨리지 효과를 누리는 사기다)과 같은 비상적인 정책수단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주요국들의 재정문제가 더욱 악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유럽 사태는 그래서 세계경제의 전체의 시스템리스크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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