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의 미디어창] 한국 부패인식지수, 국제 연구대상

권력은 화려한 수사(修辭)로 시작되지만 종종 비참한 종말로 끝을 내린다. 최고권력은 재임시에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 같지만 권력을 놓는 순간, 합법은 불법으로 정당은 부당으로 뒤바뀌게 된다. 실패한 지도자들은 말로써 뒤늦게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려 들지만 새로운 권력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이 부인과 함께 2009년 9월 11일 타이베이 지방법원에서 재임 중의 각종 비리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이들 부부에게 합계 5억 대만달러(약 180억원)의 추징금도 물렸다. 천 전 총통은 직권남용, 뇌물수수, 예산횡령, 공유재산 불법전용, 불법 돈세탁 등의 혐의로 작년 11월 구속됐고, 부인은 뇌물수수, 돈세탁 등의 혐의로 이미 2006년에 불구속 기소됐었다. 법원은 천 전 총통의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부모의 돈세탁을 도와준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각각 징역 2년6월과 1년8월을 선고했다.

현지언론은 그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8년의 재임 기간에 미화 315만 달러 가량의 정부 기밀기금을 유용하고 900만 달러 상당의 뇌물을 챙긴 혐의를 받아왔다고 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스위스 은행계좌를 통해 자금을 세탁하고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기소돼 구치소에 수감됐다.

천 전 총통은 지난 7월말 열린 마지막 변론에서"이대로 그냥 죽을 수 없다"며 재판 내내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기소에 집권 국민당의 정치적 보복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결은 아직 1심에 불과하며 최종심이 아니다. 그러나 한때 대만 최고권력자는 이제 그 화려했던 시절은 추억으로 묻고 아내와 함께 좁은 감방에서 쓸쓸히 남은 여생을 보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대부분 국가에서 엄중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대만의 경우, 부패 때문에 사실상 망국의 정부를 세운 과거전력 때문에 더욱 엄격한 중형을 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가 모두 부정부패에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 같아도 그렇지않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부패에 대해 철저한 사회적, 법적 책임을 묻는다. 이는 국가경쟁력을 함몰시키고 나아가 국가를 패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진국으로 갈수록 부패는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게 일반화돼 있다. 부정과 비리는 특권층의 단골메뉴이며 소수는 과도한 부를 향유하지만 대다수는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는 모습이 보편적이다.

국가의 투명성, 청렴성 정도를 나타내는 부패인식지수(CPI)와 국민일인당 실질소득(GNI)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소위 부패인식지수가 높은 국가(10점 만점에 8점이상)는 대부분 GNI 4만불 이상이다. 반대로 부패인식지수가 낮은 국가(10점 만점에 4점이하)는 대부분 GNI 2천불 이하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매우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어 국제적으로 연구대상이다. ‘잘살지만 부패한 나라’ ‘부패했지만 잘사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처럼 GNI가 2만불 내외면 적어도 CPI가 6-7점 사이를 오가야 하지만 4.8-5.2의 박스권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한국의 역대 권력자들은 취임사마다 결기를 세웠다. 제1대 이승만 대통령은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하며 부패척결을 강조했다. 제5대 박정희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불의와 타협을 배격하며, 부정부패의 소인을 국민 스스로가 절대 청산해야 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제12대 전두환 전대통령은 “권력남용이 이땅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본인은 법으로 국정을 집행하고 법으로 정부를 이끌어나갈 것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고 말했다. 퇴임하자마자 각종 불법과 권력남용 등으로 ‘5공비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제13대 노태우 전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천문학적인 불법비자금을 조성했다 들켜 법원으로부터 추징금을 명령받았으나 이를 갚지못하는 신세가 됐다.

제14대 김영삼 전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사회의 부정부패는 안으로 나라를 좀먹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가까운 자식의 국정농단, 부정비리 때문에 권력말기에 ‘자식의 잘못은 애비의 허물’이라며 거듭 국민앞에 사과하게 될 줄을 자신은 짐작도 못했으리라.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도 예외없이 자신의 구차한 말로 못난 측근들, 자식들의 불법, 비리를 사과해야만 했다.

권력자들이 국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기전에 자신의 측근과 가족, 친인척들을 제대로 단속하는 것이 급선무다. 국회의원, 정치인들의 끊이지않는 감방행렬, 법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모습, 밀실에서 이뤄지는 음험한 정책, 인사결정 관행... 권력이 있는 곳에 부패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국민이다. 공정한 경쟁시스템이 무너지고서야 투명하고 합리적인 정책결정을 기대할 수가 없다. 소수의 권력자들은 부당한 특혜를 누리고 대다수 국민은 희생자가 된다. 절제되고 투명한 권력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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