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박상주 <미디어오늘> 논설위원

짜증만 나던 정치판에 모처럼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총리 내정으로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흥행 대박’ 아이템을 선보인 셈이다. 이 대통령은 진보학자로 분류되는 정 총리 내정자를 영입함으로써 일석사조, 일석오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우선 진보와 통합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충청권 총리로 탕평인사의 모양새를 갖추었고, 냉담하기 짝이 없는 충청 민심을 아우르고, 신경 거슬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권가도 독주도 견제하고….

뱀 구덩이에 뛰어든 두꺼비의 행동을 관전하는 재미라고나 할까? 누구 말마따나 한복바지에 양복상의, 물과 기름, 전혀 맞지 않는 케미스트리(궁합)의 조합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맛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정운찬 흥행’은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다. 평소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중시해온 자칭 타칭 케인지안인 정 내정자가 극단적 신자유주의자인 이 대통령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호기심이 일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 사고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그가 용산참사와 미디어법, 부자감세, 공안통치 등 사회적 갈등을 빚어온 현 정부의 보수적 행보와 어떻게 보조를 맞출 것인지도 주요 관심 사안들이다.

그러나 정 내정자를 둘러싼 정치권의 반응은 다분히 호들갑스런 측면이 없지 않다. 주최 측의 흥행몰이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조금만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할 공산이 크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 내정자는 ‘MB의 푸들’ 혹은 ‘금강의 오리알’ 신세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우리 권력구조에서 총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각 언론의 정치면 분석 기사 그대로 정 내정자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순응을 하든가, 대통령과의 갈등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든가, 유연한 조정자 역할을 해내야 한다.

우선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채 현 정부의 조력자로 나선다면 결국 ‘MB의 푸들’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대권주자로서의 꿈은 버려야 한다. 평생 학자로서 가꾸어온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저버린 인물에게 표를 던질 만큼 우리 국민들이 어수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이른바 ‘이회창 코스’ 역시 그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길이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크게는 친이계와 친박계가 세력을 양분하고 있는 가운데 정몽준, 김문수, 오세훈 등 대권주자들이 짱짱한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여권 내 자기 세력이라고는 한 치도 확보하지 못한 단기필마의 정 내정자가 기댈 언덕이라고는 친이계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얼핏 유연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대통령의 고집스런 국정운영 스타일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그럴 여지도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 내정자는 죽으나 사나 이 대통령과 친이 세력을 업고 일을 도모해야 한다. 대통령과의 갈등국면이 조성되는 즉시 정 내정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금강의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 내정자는 참 좋은 이미지를 지닌 분이다. 부드럽고 선한 인상에 근사한 학자의 풍모를 지녔다.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와 다섯 남매가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어려움도 겪었고, 김 밥 한줄 싸들고 혼자 야구장을 찾는 소탈함도 지녔다.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균형 잡힌 한 마디를 던지고는 했다. 여러 해 동안 그를 향한 정치권의 러브 콜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그러나 이미지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정 내정자의 이미지를 형성해온 핵심 가치들을 버리는 순간 그의 인기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정 내정자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권의 세력 구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신을 버려야 하고, 소신을 버리자니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 내정자가 성공한 총리를 넘어 대권가도로 나가는 일은 어쩌면 ‘미션 임파서블’일지도 모른다. 설혹 톰 크루즈처럼 멋지게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정 내정자가 자신의 신념과 명예만은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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