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없는 창공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각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하고
나의 어린시절 미술시간이면 대부분 풍경을 그리기 일쑤였다.

넓은 초원위에 초가집을 그리고 있으나마나한 울타리를 낮게 그리는 것이었다.
그저 집안과 집밖을 애써 구별해 놓으려는 가벼운 표시에 지나지 않았으며
울밖에는 느티나무와 들판의 늙은 소까지 안팎이 빼곡했다.

낮은 담은 이웃집과 음식을 나눠먹는 낮은 상과 같았던 기억이 난다.
마을 앞에는 이름표를 붙여놓지도 않았다.
그저 당산나무가 서있거나 오래된 입석이 그 마을을 상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요즘 방학이 끝나간다. 아이들이 방학숙제를 하느라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의 풍경에는 각진 건물과 딱딱한 담이 그려진다.

모든 구조물은 담 안으로 들어와 앉고 울 밖은 맹맹하다.
아마도 경계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강한 모양이다.
내 어릴 적 울 없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울 높은 삶을 동경하더니
아이들에게 그런 방식을 가르친 모양이다.

어찌할까? 저 높고 탄탄한 경계를 허물려면..
방학이 끝나 가는데 내겐 숙제가 생기고 말았다.
며칠 전 어느 솔숲의 담 없는 정자에서 경계 없는 삶을 살자던 Y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허물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은 경계에 갇혀 말라 버릴지도 모른다.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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