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대화와 평화' 전방위 공세...궁지 몰린 MB 

22일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방남한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이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회동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단절됐던 남북 당국간 대화 재개의 돌파구가 열렸다.

북한 측은 이미 최고위급 조문단을 1박 2일 일정으로 보내기로 한 데다가, 방남 후 김기남 비서와 김양건 부장의 발언을 통해 당국과 만날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도 당국과의 만남 성사를 위해 물심양면 애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이다. 정부 내에서는 이번 기회를 남북관계 진전의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북의 행동을 ‘통민봉관’으로 해석하며 불편해하는 심기가 공존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해빙모드로 돌아선 북미관계와 북한의 전방위적인 ‘대화와 평화 공세’, 김대중 전 대통령 측과 야당, 학계 등의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강한 요구가 맞물리면서 이명박 정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기여’

이명박 정부 들어 멈춰 섰던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낸 이번 '조문정치'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마련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햇볕정책의 권위자이자 남북정상회담, 6.15공동선언의 주역인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 21일 오후 이희호 여사를 만난 북측 조문단 김기남 노동당 비서.ⓒ 장의위원회
또 이번 만남이 성사되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인사들, 즉 임동원.정세현.박지원 등 햇볕정책을 굳건하게 지지, 실천해 온 인사들이 '정파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쏟아부은 노력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북한 대표단 일정을 직접 조율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일 오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장인만큼 이 대통령도 상주인 셈”이라면서 “세상일의 원리대로 한다면 조문 온 사람이 상주를 안 만나는 것도 그렇고, 조문객이 상주 중에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안 만나고 그것도 좀 얘기는 안 되지 않나”라며 의지를 표하기도 했다.

북측도 이번 조문을 계기로 당국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김기남 비서는 21일 홍양호 통일부 차관에게 “다 만나겠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김양건 부장도 22일 현인택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북남관계가 시급히 개선돼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 정권 들어 첫 당국간 고위급대화임을 생각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메시지가 있으며 이 대통령 예방을 바란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문단 파견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각별한 관심을 보인 흔적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김 비서는 21일 오후 이희호 여사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여러 나라에서 조문단이 오겠지만 남보다 먼저 가서 직접 애도의 뜻을 표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사절단의 급도 높이라고 했다”고 밝혀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 조문을 각별하게 대했음을 전했다.

김기남 비서와 이희호 여사는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자’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김 비서는 “김 위원장은 역사적인 6월 15일 정상 간 만남을 회고하면서 김 대통령께서 하셨던 일을 유가족이 잘 이어나가시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말했고, 이 여사는 “오늘 만남이 남북대화가 계속될 수 있는 전환점이 되길 바라며 한민족이 사랑하고 협력하는 일이 새롭게 전개되길 희망한다”며 “김 대통령께서는 세상을 떠났지만 민족 화해와 통일이 실현된다면 지하에서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화답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 남북관계를 시급히 발전시키는 좋은 모멘텀이 생긴 셈이다.

북한, 전방위적 ‘대화와 평화’ 공세

그렇다고 이날의 극적인 만남은 '돌발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미 북한은 8월 들어 전방위적인 ‘대화와 평화 공세’를 취해왔다.

우선 지난 8월 4~5일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면담했고, 이어 미국 국적 기자 2명을 전격 석방했다. 당시 면담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진 않으나, 이 일을 계기로 북.미관계가 본격적인 대화 국면으로 전환했다는 분석이 공히 나오고 있다.

북한은 또한 지난 10일부터 17일까지 장장 7박 8일 동안 북한을 방문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파격적인 ‘선물’을 들려보냈다. 바로 현대그룹과 파트너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합의한 5개항의 ‘공동보도문’이 그것이다.

‘공동보도문’의 내용은 이른바 ‘12.1조치’의 해제, 개성관광 재개, 금강산 관광 재개, 백두산 관광 시작, 올 추석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관계의 막혀 있는 고리들을 일거에 풀어버릴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후속조치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이 조문단 파견을 공식화한 후인 지난 20일 저녁 북측은 남측에 통지문을 보내 이른바 ‘12.1 조치’를 21일부로 해제하겠다고 알려왔다. 조문단 일정 협의를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차단된 판문점 남북 적십자간 직통전화도 개설키로 했다. 또한 올 추석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논의도 진행 중에 있다.

궁지 몰린 MB의 ‘결단’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 빈소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북미관계가 용틀임을 하는 와중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를 통해 ‘선 비핵화 후 협력’이라는 기존 정책의 고수를 천명했지만 상황은 이명박 정부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이후 미국은 대북정책을 다듬고 있으며, 강경한 대북 공세의 든든한 ‘동지’였던 일본도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확실시되면서 이명박 정부와 호흡을 맞추기 힘든 상황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생전 김 전 대통령이 남북관계에 기여한 바에 대해 높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여론도 부담이다. 야당과 시민사회, 학계에서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남북관계 복원에 나서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편 정부 내에서는 북한이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을 계기로 한 ‘통미봉남’에 이어 현정은 채널과 김대중 평화센터 채널 등을 활용해 ‘통민봉관’까지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지난 20일 정부 관계자가 이번 조문단을 “사설 조문단”이라면서 “통민봉관이라는 말도 많이 쓰던데 글자 그대로 현재로서는 사설 조문단”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불편한 심기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우려는 김기남-김양건 대표단의 적극적인 의지 표명으로 해소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북미 관계 변화와 일본의 정권 교체, 북한의 적극적인 ‘대화와 평화 공세’를 진단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김영삼 정부와 달리 ‘통미봉남은 피할 것’이라고 예측해왔다. 이 대통령이 북한 조문단 일행을 만난다면 이는 이 대통령이 현 상황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으로 해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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