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별관담론 가운데 그 의미가 모호한 용법이 몇몇 발견되기에 이를 지적코자 한다. 그러한 언어의 구사는 특히 별관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폭넓게 나타난다. 이 글은 최근 법원의 가처분결정 후 방영된 지역 어느 방송사의 토론회를 2회 연속 시청한 소감에 해당한다.

각자는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 충분히 자유롭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아니올시다’ 다. 사람들은 말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것의 의미까지도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제약인데, 바로 ‘이데올로기’ 라는 거다. 화자에 따라서는 미처 의식할 사이도 없이 그것에 따르거나 또는 그것의 작동방식을 언어표현에 이용하기도 한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느 연구자의 설명을 잠시 인용해 본다. 다음은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올리비에 르불 (Olivier Reboul) 의 이야기인데,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다섯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요약해 보면 이데올로기는,

1. 당파적이다 - 과학적 이론은 진실을 위해 싸우고, 이데올로기는 무찌르기 위해 싸운다.
2. 집단적이다 - 이데올로기는 익명적 사고이며 주체 없는 담화다. 허위의식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3. 은폐적이다 -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오류임을 보여주는 사실들 또는 적대자들의 합당한 이유를 숨겨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본색을 감춰야 하는 것이다.
4. 합리화한다 - 이데올로기는 권위라는 논거에 호소하며, 그 논거가 합리적이고 현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여긴다.
5. 권력에 봉사한다 - 이데올로기는 현재의 권력을 옹호하는 신념의 복합체로서 그것의 행사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 한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별관철거 담론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철거론자 가운데 상당수는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말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런 식의 표현법을 구사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이와 같다.

1. ‘법원이 철거판정을 내렸다’
그들은 법원이 가처분을 인용한 것을 두고 ‘별관의 철거를 판정하였다’ 한다. 정녕 법원이 별관철거를 수용하였는가. 아니다. 그런 일 절대 없다. 법원의 주문사항 어디에도 ‘철거’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에 비견될 법한 표현으로 단지 ‘수거’란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별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채무자(농성자)에게 천막 등의 ‘농성관련 시설물을’ 수거하라 주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그들은 법원의 결정을 별관철거의 굳건한 새 논거로 채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허구 내지는 사실의 은폐 또는 왜곡이다.

우리는 법원이 비록 가처분신청을 인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이 결정 이후에도 사건 당사자들과 광주광역시 시민들, 나아가 전 국민의 합의하에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해결책을 도모하여 해결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고 권고하고 있음을 의미 있게 살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정부가 신청한 농성의 법적 제재수단을 절반으로 감축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설계안을 존중한다’
그들은 별관철거를 또렷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에둘러 말할 뿐이다. ‘전당의 설계를 존중한다’ 라고. 설계에 별관철거가 표현되어 있으니 그렇게 우아한 수사학을 동원하며 짐짓 자신의 교양을 뽐내려 한다. 그럼에도 전당의 설계를 규정한 설계지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않는다. 정부가 작성한 설계지침이 별관철거를 주문하였고, 설계안은 단지 그것을 따르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설계안 존중, 좋은 말이다. 별관보존을 요구하는 이 가운데 현재의 설계안을 폐기할 것과 재설계 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던가. 재설계란 말은 정부에서 먼저 나왔다. 그것도 문광부의 핵심 인사에게서. 우리 역시 현재의 설계안을 존중한다. 뿐만 아니라 공사의 원만한 추진을 희망하고 있다. 따라서 정체가 모호한 ‘설계안 존중’ 이라는 용법을 독점코자 하는 시도는 이데올로기의 은폐적 기능을 충실히 따르는 행위임을 명심하라.

3. ‘대승적으로 결단하라’
그들은 ‘별관을 포기하라, 철거에 동의하라’ 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은 상대자에 비해 자신은 이미 도덕적 우위에 있음을, 선의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자신이 합리적 대안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기초한다. 근거 없는 언어의 연금술, 대승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하다.

무엇이 대승인가. 설계안을 존중하고, 공사의 원만한 진행을 희망하며 나아가 별관보존까지 이루어 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대승적 차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별관보존을 요구하는 순간 대승적 결단은 이미 내려졌다. 단지 철거론자가 그것을 수용하는 일만이 남았다. 따라서 대승적 결단은 이데올로그들의 몫이다. 해법은 나와 있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전당건립 공사를 방해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진짜 누구인지, 이런 맥락에서 되물어야 한다.

4. ‘절차와 과정이 있었고 시기가 지났다’
절차와 과정은 하나의 형식이다. 그로부터 이끌어지는 결론을 위한 장치이지 목적물이 아니다. 하자 있는 물품을 제조사더러 ‘리콜 하라’ 주문하는데, 이미 제품이 완성되었으므로 그럴 수 없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시중에 나와 있기에 리콜 하라는 것이다. 공장이 아니라 시장에 있기에 제품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절차와 과정 및 비용에 기대어 자신의 뜻을 펼치는 이들은 ‘형식’ 이라는 권위 외에는 마땅한 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이 야기한 촛불정국 또한 정부의 결정을 리콜 하라는 시민의 주문이었다. 절차와 과정을 경유한 생산물에 대한 이의제기였던 거다. 비록 만족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정부는 그 요구를 수용치 않았는가. 한국정부에선 이미 끝난 것으로 여기는 (그러고 싶어 하는) 한미 FTA 를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다시 하자’ 고 하질 않는가.

우리는 멸실되어 흔적 없이 사라진 역사 속의 한 건축물을 되살리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도청별관은 ‘지금 이곳’에 실재하고 있다. 실존하는 대상을 보존하자는 데, 그를 위한 시기가 지났다는 이는 시간개념의 척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솔직해져야 한다. 당파적, 집단적, 은폐적, 자기 합리화, 권력봉사에 몰입하는 부류와는 진지한 대화가 형성되기 어렵다. 작년 말 시도되었던 연석회의가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각에서 연석회의 (또는 원탁회의)를 재가동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자 희망한다면 조건이 필요하다. 참여자들의 솔직담백한 자기표현이 그것이다.
/글쓴이 신왕선/shinwase@hotmail.com/건축사/광전문화유산연대 도청보존특위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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