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 참으로 곤혹스럽다. 주위 사람들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사실을 덮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광경을 목격할 때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겠지만 학교에서는 정말 크고 작은 도난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아이들 세계에서 대부분은 작은 욕심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게 만든다. 그러나 훔친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대놓고 아니라고 생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신문을 펴드니, “청와대 ‘연쇄살인 홍보지침’, 서울청 인사팀에 먼저 전달. 김유정 의원쪽 밝혀... 청와대 ‘사실 아니다’”는 기사가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학교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머릿속에 오버랩되면서 다가온다. 양쪽이 각각 옳다고 우기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치지 않아야’ 할 경우라고 아전인수하는 꼴이다. 지침을 작성한 당사자가 이미 사퇴한 마당이라면 오해는 키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보다 더 유치한 대응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먼저 나온다.

오래된 이야기다. 한번은 학급 안에서 분실사고가 생겼다. 체육시간을 전후로 학급 안에서 돈을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 습관성 도벽이 있던 친구였던 모양인지라 아이들은 담임에게 당당하게 신고(?)한 것이다. 이럴 때 손버릇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좋지 않은 학생이라도 담임의 입장에서는 신고한 아이들 이야기만 믿고 섣불리 판정할 수 없다. 도둑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벽을 끊어 어떻게 교육적으로 교화시킬 것인가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더욱이 목격자도 보호받아야 하고, 피해자도, 도둑질한 가해자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사건은 다행스럽게도 목격자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목격자란 돈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입장에서는 다행이지만 도둑질을 한 학생에게는 고약한 존재이다. 피해자로부터 한 치도 도망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목격자는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할 것인가. 목격자는 ‘숨김과 알림’사이의 양심적 갈등에 시달린다. 그 양쪽 기로에서 고뇌를 더욱 떳떳하게 하도록 사회가 만들어준다면 입 밖으로 발설하는 순간 모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일이지 않는가.

교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단순하게 도둑질한 돈을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목격자가 힘이 약한 학생일 경우 교사가 가장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폭로하면 신고한 학생이 보복당할 수도 있다. 사건 앞에 목격자가 없었다면 미해결문제로 남았을 일이 아닌가. 다행이다. 과연 다행일까? 항상 목격자만 근거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목격자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헤아리는 것도 중요하다. 가해자도, 그것을 지켜보는 반 친구들도, 모두 껴안고 가야할 몫이다. 어찌어찌 결국 사건이 무난하게 해결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우려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의 일이 전개되었다. 가해자의 돈을 훔치는 보복행위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반 아이들은 우리 반의 소행이 아니라고 정리했던 담임선생의 사건정리가 불편부당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 반 친구가 한 짓이라고 확신했던 것을 어정쩡하게 넘어가려던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응징이었던 것이다. 사건 전말에 대해 결국 솔직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두 축으로 복잡하게 꼬인 사건이 진실을 공개하자 수습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정확한 판단을 한다. 교육적 거짓말은 선의의 측면에서 이용되더라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는 또 해맑은 아이들로부터 배운다.

‘홍보지침’사건을 둘러싼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들만도 못한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은 여전히 맑다. 어린 아이라고 깔보기 십상이지만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는 어른들을 위한 교훈감이다. 선생님일지라도 정의롭지 못하면 위상이나 권위도 반드시 손보겠다는 기개가 얼마나 당당한 것인가. 최근 들어 국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왜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것일까, 진실의 가치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그럴까,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일어난다. 과연 ‘국민을 섬긴다.’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찾고 싶다.

국정을 책임지는 분들은 ‘이메일 홍보지침’ 사건을 다루면서 진실을 밝히고 도벽을 치유할 교사의 입장에 서주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 아이들 앞에서 교사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양심과 진실을 교사가 모두 책임질 수 없는 범위이다. 교사는 그럴만한 권력도 없고 위치도 아니다. 미미한 책임 아래 도덕적 책임만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교사가 도둑을 잡고 도벽에 대한 교육적 치유가 동시에 이루어지듯이 ‘한 사건 앞’에 정치나 언론의 관점이 교육적 동행의지를 가질 때 우리 사회는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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