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고 즐길 자격이 있다

역사의 한 장을 보았습니다. 엉클 톰과 쿤타킨테의 나라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성서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 아!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 MBC 생중계 화면 캡쳐. @미디어오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설마 우리 시대에 이뤄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 나라가 깨어나,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참뜻을 실현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그리고 "나의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으며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 말입니다.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인간이 달에 발을 내딛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국인이 노벨상을 탈 수는 있어도 그러나 '와스프'(WASP)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피부색이 검은 흑인 대통령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테크놀로지에 의지한 인류의 진보는 빨라도 적의와 대립에 기반한 인간의 본질은 더디 변하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전범' 부시가 두 번이나 연속 대통령에 뽑힌 나라였기에 충격과 감동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란 나라는 지구의 수치이자 절망이며 저주였는데...

그러나 오늘 버럭 오바마를 자신들의 44대 대통령으로 전세계에 당당히 소개하는 미국인들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자부심과 희망, 축복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4년 전 고개를 떨구며 "We are sorry"를 고백하던 그늘진 표정은 더이상 없었습니다. 대신 "We did it"을 합창하며 "Let's hang out"을 소리높여 외치는 행복한 미소만이 넘실댔습니다.

▲ 미국민들의 "We are sorry" 고백으로 가득했던 사이트에 감사의 글들이 올려져 있다. @미디어오늘

확실히 그들은 즐길 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인종차별의 벽을 그들은 단숨에 뛰어 넘었습니다. "피부색과 관계없이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를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현실의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는 말을 전세계들로 하여금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파급력과 충격은 부시의 재선이 몰고 온 비극과 재난의 무게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입니다.

미국민의 흥분과 지구촌의 감격이 교차하는 오바마 취임식을 TV로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오늘의 환희를 좀더 극적으로 맛보게 하기 위해 신이 지난 8년간 인류에게 그토록 쓰디쓴 고통을 감내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미국에 대해 반감이 많은 나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미국이 몹시 부럽게 느껴집니다. 오바마를 뽑은 그들의 안목이, 그리고 오바마를 가진 그들의 행복이. 내가 발 딛고 사는, 명색이 민주국가라는 이 나라에서 차마 상상할 수 없는 목불인견의 꼴불견들이 속출하고 있어서 그러는 걸까요?

아다시피, 지금 이 땅에선 촛불시위에 참가했다 하여 경찰에 불려나가고, 인터넷에 허위사실을 올렸다 하여 검찰에 구속되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정일 왕국에서나 들을 법한 '속도전'이란 말들이 거침없이 횡행하고, '초전박살' 정신에 따라 모든 것을 밀어 붙이고자 하는 정부의 조급증 때문에 심지어 철거민들이 떼거지로 죽는 참사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슬픔이라니...!

오늘 취임식장에서 오바마는 '공동의 선'을 주장하며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감시의 눈이 없다면 시장이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혼란으로 빠져들고, 시장이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할 때 한 국가가 더 이상 번영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블라블라블라.

스스로 "오바마를 닮았다"고 밑도끝도 없이 떠벌이고 다니는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에 대해 뭐라 말할까요? 그의 반응이 새삼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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