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으로 인류 최후의 정부형태가 될지 모르며,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종말’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내부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류 최후의 시스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는 미국이 지켜오던 이념인 레이거니즘과 자유민주주의가 퇴조하고 있다고 주장(뉴스위크, 2008.9.13)해 미국식자본주의모델이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인류사의 과정에서 20세기 말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유일한 자본주의가 21세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세계 각국이 미국 부동산 거품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지난 9월 1달 동안 각국 정부가 금융기관에 지출한 구제금융 규모가 2007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9570억 달러를 넘어 약 9768억 달러로 1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한겨레, 2008.10.3).

여기에 미국정부가 의회에 요청해 승인된 부실채권관리기금 7000억 달러를 합하면 1조6천억 달러(약2000조원)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가 지난 9월 30일 발표한 2009년 예산안 약 274조의 7.3배로 국민들이 세금 한 푼 안내고도 7년 정도의 나라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런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은 논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에서 찾는다. 즉 주택가격 하락으로 모기지시장이 부실화되고, 이는 곧 모기지 관련업체 및 보증기관의 부실자산의 증가로 연결되어, 유동화증권 등 파생금융상품의 가격 하락으로 결국 대형은행 및 금융기관 부실이나 파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부동산 거품에 단초를 제공한 것은 저금리로 야기된 과잉 유동성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여기에는 1990년대 후반 정보통신기술의 호황을 바탕으로 한 신경제 거품이 꺼진 이후 여유자금들이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갔다.

또 2000년대 초반기 3년 가까이 2%대의 낮은 금리 유지로 유동성이 넘쳐나, 이는 곧 주택가격 폭등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시장 규제완화는 금융파생상품의 범람으로 연결되어,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대출채권을 유동화증권으로 만들어 팔아 버리고 유동화증권은 또 다른 파생상품으로 발전해 금융시장을 배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위기는 저금리에서 비롯된 과잉유동성과 지나친 규제완화로 과도하게 팽창한 금융자본의 합작품으로 파국의 결정적 요인은 부동산 거품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 축적방식이 금전적인 면, 즉 글로벌 초국적 금융자본 중심의 축적전략으로의 자본주의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보인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기능방식은 금융간의 경쟁을 통해 수익률을 늘리고, 이것을 이용해 금융시장은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해외금융기관들의 대형투자펀드, 헤지펀드, 사모펀드들은 현금 동원 능력이 막강해져, 투자를 통해 전통적인 기업체들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이 업체들로부터 구조조정을 통해 높은 수익률을 강제로 얻어낸다.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은 항상 일자리를 감소시키고, 노동여건과 임금 수준을 낮추고, 현지의 이해관계자들 대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런 자본축적 구조는 사회와 실물 경제에 대한 금융적 억압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고 부자들에게 유리한 재분배를 단행한다. 그 결과 일자리는 비정규직화 되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은 늘어나고, 투기성펀드들은 이렇게 하여 자신들이 얻는 높은 수익의 실질적인 기반을 파괴한다. 결국 기업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주주들, 즉 펀드들과 그 고객들이 단기적으로 이익을 내도록 재편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 내부에서부터 경제․사회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모순들이 내재적으로 심화된 것이 바로 금융위기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 축적 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사회의 주류 논객들은 모두들 세계화․개방화시대에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시작도 있고 종말도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가 휘청거리고 있고, 특히 신자유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시기라면, 이를 넘어서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그 이유는 임금을 삭감하고, 정부가 교육, 의료, 복지 등에 지출해야 할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으로 자본축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성장담론에는 성장이 없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OECD국가들에서도 오히려 경제성장률은 하락했다. 결국 신자유주의에는 성장도 분배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에 종말을 고하고 다른 모델을 찾아야 한다.

현재 포스트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 국내 일부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정시장경제론(coordinated market economics), 엘마 알트파터의 연대경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participatory economics) 등등이다. 조정시장경제론은 기업이익 증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식신자유주의모델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익을 고려해 효율을 높이는 북유럽형자본주의 모델을 도입하자는 입장이다.

세계화와 개방의 성과를 활용하려면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부작용인 사회갈등과 충격을 흡수․조정할 수 있는 사회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예상되는 시장실패에 대해서 국가가 사전적으로 개입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투자확대․기술혁신․인적자원관리 강화→생산성향상→고임금 복지확대→내수창출로 연결되는 상향평준화(high road)전략이 결합되는 한국형 민주적 시장경제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울 징거는 연대경제를 경제적 불가피한 강제를 벗어난 어떤 특정한 노동과 특정한 생활양식을 위한 결단이라고 주장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자생존 경쟁’에서 벌어지는 각축전보다 협력과 연대의식을 더 우선시 한다. 연대의식은 실업, 빈곤 혹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문화, 민족, 지역, 계층을 포괄하는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형성돼 있을 수 있으며, 한 사회에서의 공통성과 내적 결속성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엘마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에서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미래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비판은 가치가 있고, 대안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는데,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경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경제의 주도권을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는 것이다.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엘마 알트파터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지속 가능한 태양 에너지 사회이다.

또한 연대경제는 오직 생태학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화석 에너지가 재생 가능 에너지로 시급히 대체되어야 하며, 그것이 경제, 생태, 사회의 새로운 동맹, 그리고 생산, 소비, 자연의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 길만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파레콘(parecon)은 참여경제학을 일컫는 말로 공평성,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생태적 균형 등의 기본적 가치들에 기초해 경제정의를 구현하는 제도적 비전을 제시한다. 평등한 소유권,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의 단체, 새로운 노동조직과 보상체계 및 생산과 소비, 그리고 대안적 할당(참여적 계획) 등을 주요 근간으로 삼는다. 한마디로 시장이나 중앙계획, 경쟁이나 통제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도 참여적 계획과 공유에 토대를 두는 사회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와 관련하여 미국식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포스트신자유주의에 일관적이고 지속적이며 실행 가능한 경제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 비전의 내용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며, 무엇이 가능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이다. 이미 미국발 쇼크로 사형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 담론으로 우리 경제를 주도하려는 무도한 시도들이 이명박 정부에서는 기획․집행되고 있다. 미국식 투자은행 모델을 금융선진화 방안으로 밀어 붙이고 있고,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만이 지고지선의 가치인양 받들고,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을 서민대중을 위한 정책인양 호도하는 정부가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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