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현대사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진상을 파악하기 힘든 의혹사건들이 많다는 것이다. 진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까닭에 시시비비 또한 가리기 어렵다. 이글에서는 해방 직후 최대의 의혹사건이라고 할 만한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이하 정판사위폐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에 의해 유죄로 확정된 이 사건의 개요를 대략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에 걸쳐 조선공산당의 기관지를 인쇄하던 조선정판사에서 공산당원인 정판사직원들이 당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폐를 위조하여 시중에 유통시킨 사건이다. 이들에게 지폐 위조 지령을 내린 사람은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이었다. 이것이 검찰 및 재판부가 말하는 사건의 개요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건 발생 시점부터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피고인 및 변호인 측에서 제기한 검찰 공소내용에 대한 의혹과 반증들은 공판정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재판은 유죄로 종결되었다. 그 뒤 정판사위폐사건의 의혹은 잊혀져갔다.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기존의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이 사건을 유죄로 확정하고 서술하고 있다. 검찰과 재판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의혹사건은 다 다뤘다고 볼 수 있는 모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인『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판사위폐사건을 ‘의혹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논란을 일으켰던 사건, 즉 유죄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확실한 직접적인 물적 증거가 거의 없었다고 하면, 과연 믿을까?

당시는 미군정 치하였다. 미군정의 정보보고서에 역시 정판사위폐사건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정보보고서는 정판사위폐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관련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을 뿐만 아니라 발견된 위조지폐도 거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째서 ‘유죄’로 판결이 난 것인가? 경찰과 검찰은 그리고 재판부는 무슨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인가?

공판기록에 적힌 정판사위폐사건

우선『위폐사건공판기록』(서울지방심리원, 1947)에 기재된 지폐위조의 범죄사실을 살펴보자. 역사를 다루는 글이기에 사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 이 글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피고인 송언필과 김창선은 1945년 10월 하순 어느 날 밤 조선정판사에서 숙직할 때 서로 조선공산당 및 조선정판사에 재정난에 관한 담화를 하다가 피고인 김창선이 ‘징크판이 있으니 돈을 인쇄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송언필은 위험하다고 불응하였다.

그러나 약 3일후 조선정판사 사무실에서 박낙종에게 ‘김창선이가 은행권인쇄사용 의논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문의한 즉 박낙종은 주저하다가 조선정판사 빌딩 2층에 있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그 제안을 전한 바 이관술도 처음은 주저하였으나 ‘탄로되지 않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君(박낙종)에게 일임하니 해보라’고 말하였다. 

이에 박낙종은 사무실에 내려와 피고인 송언필에게 송언필은 김창선에게 순차로 인쇄부탁을 하고 김창선은 신임하는 피고인 정명환, 김상선, 김우용, 홍계훈에게 ‘송언필이가 공산당 자금으로 쓸 은행권을 인쇄하여 달라 하니 인쇄하자’는 말을 하였던 바 同 피고인들도 최초는 반대 또는 주저하였으나 결국 승낙한 것. 

피고인 송언필은 별도로 신광범에게 경계를 박상근에게 용지출고 및 재단을 부탁하여 피고인 박낙종, 송언필, 김창선, 정명환, 김상선, 김우용, 홍계훈, 신광범, 박상근은 이관술과 함께 은행권을 위조하여 조선공산당비로 사용 행사할 것을 공모하여 조선정판사에서 1945년 10월 하순 어느 날 밤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 5·6시경까지 조선은행권 100원 권 약 2백만 원을 인쇄하고, 재단기를 사용 재단하여 위조를 완성한 후 이것을 이관술에게 전해주어 이관술이 조선공산당비로 사용하여 경제사용을 교란하였다.

(이 밖에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① 1945년 12월 27일경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 5·6시경까지, ② 1945년 12월 28일의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경까지, ③ 1945년 12월 29일의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경까지, ④ 1946년 2월 8일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경까지, ⑤ 1946년 2월 9일 오후 9시경부터 다음 날 오후 1시경까지 行使의 목적으로서 매회 조선은행권 100원 권 약 2백만 원씩을 인쇄 재단하여 그 때마다 통용의 은행권을 위조한 후 이것을 이관술에게 전하여 조선공산당비로 사용하여 경제를 교란하였다.”

이상의 ‘범죄사실’은 전적으로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한 진술로 구성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안순규의 현장목격 증언진술을 범죄사실의 확증으로 내세웠다. 안순규는 사건 초기에는 용의자 중의 한 명이었다. 아무튼 정판사위폐사건의 범죄사실에 대한 핵심증거는 피고인들의 자백진술과 안순규의 증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미군정 정보보고서에서 물증이 없었다고 한 점을 상기하라. 그런데 나중에 피고인들은 재판정에서 자백에 의한 진술이 허위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진술을 뒤집었다. 안순규 역시 자신의 현장목격증언 역시 허위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모두 고문을 당하여 거짓자백을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피고인은 물론이고 검찰 측에 내세운 증인마저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에 주장에 따르면 정판사위폐사건은 고문조작사건이었다. 

피고인들과 검찰 측 증인 모두 고문조작사건이라고 주장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의 범죄사실의 핵심적인 증거는 피고인들의 자백과 현장을 목격했다는 안순규의 증언이다. 그런데 피고인들과 안순규는 고문에 의해 강요받은 허위자백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진술을 번복하였다. 담당검사 조재천 역시 피고인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그는 검찰 논고에서 “경찰에서 초기에는 어느 정도의 고문은 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피고인들이 말하는 전기간에 걸친 가혹한 고문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피고인들의 고문을 받았다는, 경미한 고문을 받았다는 증언을 내세워 고문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더 나아가 ‘범죄사실이 엄존하는 경우에는 고문의 유무는 별문제’이며 ‘경찰의 고문과 검사의 공소는 별문제’라는 논리를 폈다. 재판부 역시 이들의 진술 번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증인 안순규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한 결과 위증죄로 1년형을 언도받았다. 본 사건이 판결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피고인들이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미군정기 경찰들의 고문수사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신문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고문관련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이 된 직후에도 고문수사가 빈번했던 것은 미군정이 일제시대의 경험 있는 친일경찰관들을 대거 등용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문에 익숙해 있던 친일경찰들이 해방된 나라에서도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고문 수자를 재연했던 것이다. 과연 수많은 고문과 가혹행위가 잇따라 일어났고, 이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항의가 빗발쳤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역시 고문수사 문제를 시인하였다.

더구나 정판사위폐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들의 면면을 볼 때 피고인들이 수사 및 취조의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은 높다. 사건담당 경찰들은 누구인가.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구범(본정경찰서장), 최난수(수사계장), 현을성, 이희남, 김원기, 조성기 등이다. 이들 중 이구범과 최난수는 일제시기 경부보였다. 담당 수사관 중 최고위 간부 두 명이 친일경찰이었다.

당시 공판기록을 보면 1관구 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이 피고인들의 취조에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덕술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악질적인 고문수사로 유명한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노덕술은 1948년에 고문치사사건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법정에 서게 된다.

해방 후 경찰의 조사를 받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일제시대보다 해방 후 경찰이 더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노덕술을 포함한 사회주의자 담당 수사관들의 ‘악독한’ 행위는 해방 이후에도 이미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고춧물 먹이기는 물론, 전화기 고문으로 알려진 전기고문, 일명 비행기타기로 알려진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기 같은 고문은 기본이고, 차라리 상해 치상에 가까운 고문들이 행해졌다.

정치범뿐만 아니라 일반 범죄 피의자도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폭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구타와 고문은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으나 미군들은 ‘세부적인 행정사항’에 대해 조선인 경찰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못 본체하고 오히려 부추겼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근무했던 미국 신문기자 마크 게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경찰들이 끝이 날카롭고 나무가 달린 인두를 발톱 밑에 쑤셔 넣고, 정강이뼈가 금이 가도록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물고문하는 것을 보았다. 혐의자 입에다 튜브를 집어넣고 그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물을 퍼부었다. 경관들이 한 남자의 어깨를 금속성 막대기로 갈기로는 어개 날개뼈 아래에 금속성 갈고리로 그 남자를 거는 것을 보았다.”

수사 초기 피고인들은 여러 경찰들에 의해 따로 따로 조사(취조)를 받았다. 이때의 진술내용을 살펴보면 범행시점과 범행참가자 등이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인 경우에도 취조를 받을 때마다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수환은 그의 책『소위 ‘정판사위폐사건’의 해부 - 반동파모략의 진상을 폭로함』(1947)에서 피고인들이 고문에 못 이겨 담당 경찰들이 묻은 말을 무조건 인정하다보니 너무나도 제각각인 진술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건인가에 대한 논란은 사건초기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피고들을 짧게는 1주일, 길게는 12일간 경찰의 조사를 받는 동안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끝까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판사위폐사건은 정치적 사건이다

앞에서 고찰한 것처럼 1946년의 정판사위폐사건은 고문조작사건이라는 의혹을 남겨둔 채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 자체의 의혹을 해명하는 데에만 집중하다보면 사건이 가진 역사적 성격을 간과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정판사사건이 발생했던 때인 1946년 5월은 미소공위가 막 휴회된 때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상태에 빠졌을 때, 미군 CIC와 경찰, 하지중장의 정치 브레인인 버취중위 등은 좌익을 분열시키고 탄압하는 작업을 벌였다. 조봉암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 여운홍의 인민당 탈당, 조선정판사위폐사건 등은 거의 똑같은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조봉암의 서신사건이나 여운홍의 인민당 탈당사건보다도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공산당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이 미군정시기 최대의 의혹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정판사위폐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은 당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방향전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미소공위 휴회 후에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결국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부인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이주하는 체포되었고, 박헌영과 이강국은 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로써 좌익은 범법자, 반란분자, 반역분자로 변해버렸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지(?)들로 가득 찬 교도소였다.

이 밖에도 이 사건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관술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및 경찰에 의한 조직적인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재소자들은 최소 1,800명에 이른다고 미군문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의 주요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조선일보』『서울신문』『중앙신문』
『위폐사건공판기록』(서울지방심리원, 1947)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1991)
『소위 ‘정판사위폐사건’의 해부 - 반동파모략의 진상을 폭로함』(박수환, 1947)
『야만시대의 기록』2(박원순, 2006)
『이관술』(안재성, 2006)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정용욱,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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