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인가

[데일리서프라이즈 김헌식 문화평론가] 건달이 한 여성을 납치해 감금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게 했다. 아이도 생기고 집안 살림살이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제 동거 생활은 계속 되었다. 자, 이 여성의 삶은 발전한 것일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살림살이는 늘어나지 않았는가. 식민지 근대화론도 이와 같다. 강제적 병합 이후 경제적으로 늘어난 살림살이를 들어 과연 ‘발전’이라고 평가할 있을까. 하지만 이번 23일 내놓은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도 이런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낳은 맥락은 민족주의와 좌파 시각에 벗어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정립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역사적 방법론에서 객관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통계조차도 완전한 객관은 있을 수 없다. 가설이나 조작적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관점을 취할 수 밖에 없고, 결국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도 객관적이지 않다.

한국 근·현대사 집필진은 일제시대를 민족주의 시각에서 보자면 부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일제시기에 일어난 발전을 간과한다고 본다. 이는 균형의 회복, 객관성을 갖추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지엽적인 시각에 머물 뿐이다.

우선 결과론적 역사관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도야 어떠하든 결과론적으로 의미 있는 산출물이 있으면 이를 평가·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론적인 기계적 균형주의는 본질적인 균형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구나 국제정치적으로 이러한 논리가 일제에 역이용 당하는 것은 다시금 식민주의의 정당화를 가능하게 한다. 객관주의의 치명적인 모멸이다.

특히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는 시장적 경제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이러한 면에서 시장적 경제주의적 사관이다. 예컨대, 시장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발전은 공평하고 근대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시장에 개입해 왔으며, 이는 일제시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통치권은 일제에게 있었다. 일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 독재 시기나 경제 개발 과정을 봐도 그렇다.

따라서 시장과 경제를 분리할 수 없으며, 경제적인 성과만을 들어 과정상의 문제점을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것도 역시 결과론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경제주의는 인문주의적 사관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적 경제주의 사관으로 인문학적 사관을 그른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한국 근·현대사’는 어떠한 객관이나 합리적인 기술원칙이 있지 않다. 다만, 기존의 인식에 대한 재인식, 전복, 재반박일 뿐이다. 따라서 대안교과서라고 할 수 없다. 이 책에서 타개 목표로 상정하고 있는 대상은 이른바 좌파 역사론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같은 책을 상정한다. 곧 대안 교과서라는 한국 근현대사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의 연장이다. 다만,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좌파만이 아니라 정통 주류학계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980년대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올 때만 해도 역사기술은 모두 관변적이었다. 여기에서 관변적이라는 말은 대한민국 찬양일색의 역사기술이었다는 의미다. 이것이 오히려 객관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국가와 정권의 편만을 들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정권일변도의 획일적인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저술된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찬양일색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변 역사기술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 근·현대사’는 국가주의란 민족주의이며 이를 배격하려 한다면서도 다시 국가주의에 갇혔다. 좌파적 역사 기술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이 반드시 대한민국의 붕괴를 바라는 북한 공산당의 시각은 아니다. 비판은 붕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건설을 위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사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한민국 안에 갇혔다. 이러한 시각은 역시 민족주의에서 벗어난다는 미명으로 북한이나 동포의 역사, 세계성을 배제해 버린다. 이는 자연스럽게 반통일적인 시각과 일치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목적적 대한민국 용비어천가’는 거꾸로 시장적 경제주의 관점과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의 시각은 지나치게 리더의 역할을 크게 강조한다. 엘리트 사관의 연장이다. 이렇게 정치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좌파적 시각이라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데, 예컨대, 민중을 강조하는 시각도 포함된다. 이런 것이 좌파 시각론이라면 정조나 세종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 백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국 근ㆍ현대사’는 민중이나 서민을 불편해 하는 중산층 혹은 상류층을 위한 위안물이다. 다층성을 이야기 하지만 반대를 위한 일면을 드러낼 뿐이다.

수단적 객관주의나 기계적 균형주의 회복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큰 틀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극단적 민족주의를 상품화 하는 역사관은 경계해야한다.

자신들과 다르다고 모든 것을 허수아비 전략 삼아 공포 심리를 부추길 필요는 없다. 좌파적 역사관이 주류가 된 것으로 호도하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타당화 하는 것도 오히려 감정적이다. 뉴라이트처럼 정치적 이념 목적 차원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8억인과의 대화’같은 책들이 간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책들이 나름대로 저변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공감대와 고민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역사관도 마찬가지다.

과연 대안 교과서라는 ‘한국 근ㆍ현대사’도 그러한 공감대와 고민의 치열성을 담고 있는지, 그것은 결국 이 땅의 뭇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지,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강요할 일이 아니다. 이미 대안 교과서라는 명칭에서 지식인의 오만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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