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찾아간 고향.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물 빠진 개펄 위를 걸어가는 초로의 사내가 있었다. 뉘엿뉘엿 기우는 해 그늘 따라 점점 바닷물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막기라도 하듯 발가락에 자꾸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입을 쩍쩍 벌린 바지락이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마치 계시와도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돌이킨 그는 이웃마을까지도 살판나는 바지락 양식장을 일구었다.

가만 보면 걸음마다 어디 걸리지 않은 적이 있던가. 발길에 채이고, 장사진을 이룬 차량에 막히고, 황사먼지에 눈시울이 따갑다. 누구나 철들어서 한두 번쯤은 그 앞에서 망설이곤 하던 죽음은 또 얼마나 걸리던가. 그러나 걸리는 것이야말로 누군가 진정 자신을 위해 보내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희망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구 어디에 불씨 하나만 있다면 깊은 밤에도 어둡다고 말해선 안 된다. 태양의 흑점 속에 갇힌 듯 두려운 밤에는 더욱 그래야 한다.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이라도 찾아 나서는 부르튼 발길말고는 죄 낭비요 거짓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누구를 탓할 겨를이 없다.

이웃에의 원망이나 탄식, 세상 탓마다 한 꺼풀의 어둠을 덧칠할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분을 잡치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몰아붙이고, 사람 사이를 벌이려드는 소음에는 귀를 막고, 겨울이 추워도 봄은 따뜻하고 캄캄한 밤일수록 작은 불빛도 한결 소중하다는 지극한 상식에만 귀 기울여야 한다.

어쩌든지 사랑하는 사람 손을 꼭 잡고 그 촉촉한 손에 숨은 불씨를 켜야 한다. 시방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언어와 문법은 이웃에 대한 희망과 격려뿐이다. 진실과 도덕과 상식이 눈먼돈에 가려 어두운 세상이라지만 그럴수록 숨은 양심과 작은 선행도 값지지 않겠는가.

새해 첫 날, 티브이.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앓는 흑인 아이가 코끝을 찡하게 한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하지만 가난해서 마땅한 기증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대책이 없는 상황. 무능한 아버지가 안타깝고 죄스러워 눈물을 흘리자, “아빠,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빠는 나를 낳아 주셨잖아요.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라고 아픔을 참으며 웃는다. 대부분 “왜 이렇게 낳았느냐”고 원망하며 짜증을 부릴 게 뻔한데 그 흑인 아이는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다.

위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분리수거를 하려고 버린 플라스틱 바구니를 신이 나서 주어들고 간다. 왜 하필 그런 걸 챙기느냐니까 아직 쓸만한 걸 버리는 게 아까워서라고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5층 버튼을 누른 후 뒤돌아보자 아이는 괜찮다며 바싹 다가선다. 한 계단만 걸어서 올라가면 되는데, 괜히 한번 누르는데 300원이 드는 벨을 또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단다. 무엇보다도 만날 때마다 그 해맑은 인사깔이 이웃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렇다!, 멀리 저런 흑인아이와 가까이 이런 이웃 아이가 있는 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내일이면 지구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하며 그 절망을 주변에까지 확산해온 죄들이 너무 크다. 부끄럽다. 아무리 말세라고 해도 탕자보다 더 많은 의인들이 있어서 인류 역사는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져 온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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