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는 최소한의 선택권조차 접어둔 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몸을 방목하며 혹사한다. 그 영혼은 육신의 상처와, 그 육신은 영혼의 상처와 더불어 썩어 간다. 심신을 연장하기 위해 오히려 심신을 망가뜨리고 마는 그 외길을 가기 위하여, 우연을 연출한 고객에게 인스턴트 쾌락을 팔기에 급급하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아라“는 속담은 그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 인연은 그저 상품화한 시간을 공동소비 하는 철저한 거래 일 뿐이다. 그들에게 생산과 소비의 개념은 모호하다. 그들은 영육을 싸잡아 소비하며 그것을 소득 창출을 위한 생산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점점 질서를 붕괴시키며 무질서의 늪에 둥지를 튼다. 그들은 무질서와 자유를 별 불편 없이 혼동해버린다. 아무리 신성한 것도 그들의 식탁 위에 오르면 비린내뿐인 생선이다. 경건한 것일수록 그들에겐 희화적이고 거추장스런 적의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타락과 저주, 파멸의 황무지이다.

더는 잃어버릴 것이 없는, 그러기에 새로 찾을 것도 없는 그들에게 시간은 귀찮고 무료한 덤이다. 그들은 무의미의 포로이며, 옴처럼 가렵고 어지러운 가벼움의 노예이다. 그들에게 신은 퇴역한 심판이며, 그들의 제단에는 미신이 첫사랑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들에게 역사는 늘 세기말이다.

그들의 하늘엔 샛별이나 보름달이 떠 있는 게 아니라 음울한 혜성이 작달비로 쏟아지고 있다. 그들에게 선과 악은 현행법도, 이분법도 아니다. 피아의 경계가 사라진 빈터에는 수위조절 능력을 상실한 감정의 흐름 따라 반사적 탈법이 춤을 춘다. 그들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몽환의 딸이다.

절망은 그들에게 더 이상 위협이나 회한의 도로 표지판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희망에 무기력한 것처럼 절망에도 무감각하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 역시 더 이상 의미의 국경이 아니다. 그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사막의, 암벽의 회색 이정표다. 그들의 주민등록엔 숙취와 자조, 공격적 자학과 메마른 혀가 가족으로 등재돼 있다.

바람은 그들의 초원이자 목동이다. 그들의 언어는 신의와 성실의 법칙에서 해방된 탈사회적 방언이다. 그들에게 악마는 천사보다 친근하고, 편하고, 유용한 후원자다. 그들의 섬은 인파가 붐빌수록 무인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냄새를 맡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인육 중독자이다. 타인에 대한 무차별 폭력 또한 그들이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사회성의 표현이다.

그들에게 손님은 불특정 다수이며 편리한 익명이다. 그들이 손님들의 배설구인 것처럼 손님들 역시 그들이 피우다 버리는 마리화나이다. 단물만 빨고 곧장 버리는 풍선껌이다. 그러니까 둘은 습관처럼 서로의 필요를 초고속으로 핥고 뱉는 은원 관계인 것이다.

둘 사이엔 성문법이 없다. 관습법만으로도 질서 유지가 충분하다. 둘 사이의 이질적 언어
는 어떤 모국어보다도 직설적인 일차언어로 통역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공생관계 같지만,
한 쪽이 몇 푼의 티슈 값으로 잠시 유료화장실을 다녀가는 동안 한 쪽은 무단 방치된 분뇨
처리장처럼 몸과 혼이 악취로 들끓는다.

그러기에 고객들은 안전 보호대를 찬 자신의 물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말짱한 것에 반해, 상대는 분명 그 부분뿐 아니라 전신이 썩어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소름끼치는 타성적 무의식이 소중한 영혼을 질식시키고, 무수한 모성과 순결을 짓밟고 정조를 유린한 범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객은 상대적일 때만 탄생하는 단어이다. 유혹하는 자보다 유혹 당하는 자가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면 유혹하는 자는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혹하는 자는 대개 도덕적으로 약자이다. 유혹을 물리치는 자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강자이다. 강자가 약자를 위하는 길은 약자의 유혹으로부터 초연한 강성의 유지이다.

망각의 시렁 위에 주체성을 맡겨놓고 부초처럼 떠돌며 주체의 타락이나 해체를 종용하는 유혹은 사라져야 한다. 그들이 하루속히 주체의 위치를 굳히게 자립의지를 키워주는 길밖엔 없다. 사회 도처에 만연한 각양각색의 창부들을 구제하는 범사회적 내과수술인 것이다.


이 땅에서 민족이 민족의 피와 살을 사고 파는 패륜은 얼마나 퇴폐적이고 역사적이었던가?
양심을 팔고, 표를 팔고, 주권을 파는 창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썩은 영육을 어르고 짓밟으며, 고객은 물론 악덕 포주노릇까지 서슴지 않는 창부 중의 창부는 또 얼마인가.

둘러볼수록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도처에 웬 창부들이 그렇게도 널려있을까. 그리고 창부습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는 정신의 에이즈, 창부 기질을 청산하지 않고서 국가, 민족, 개인의 진정성은 기대할 수 없다. 먼저 자신의 어느 구석에 도사리고있을 지도 모르는 창부 성향을 도려내고, 어떤 유혹에도 결코 넘어가지 않는 자신을 올곧게 지켜 나가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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