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①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②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③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④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 玄德

전문 번역
군영의 백(백성)을 하나로 않아 나아갈 때 능히 흩어짐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백성의) 기가 부드러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능히 갓난아이와 같이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사는 집의) 섬돌을 씻고 가물게 살펴보아 능히 흠(아픔)이 없도록 하겠는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리는데 있어서 능히 지식이 없이 (덕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늘 문이 열리고 닫힘(덕을 널리 행함)에 능히 배우자 없이 (홀로) 할 수 있겠는가? 백(白,道)을 밝혀 온누리에 미침에 능히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이들이) 살아가며 이들을 기름에, 살아갈 뿐 (드러내어) 있으려 않고, 베풀 뿐 (그 베풂에) 의지하지 않으며, 우두머리가 되어도 다스림으로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현덕(玄德)이라 하니라.

{나의 역해서와는 ②,④의 번역을 좀 고쳤으며 기존서와는 전반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장의 역해는 ‘이’의 표현을 빌리면 노자 등선(登仙) 후 2천여 년 동안 완전 헛다리를 짚은 장이다. 정치적인 능력(정치력)을 묻는 장인데도 기존의 해석들은 정확한 맥을 잡지 못하고 앞뒤도 맞지 않는 해석을 어리슬쩍 뱉어놓고 넘어가 버렸다. 노자성인이 바라보는 지도자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라고 내가 염원하는 지도자 상이다.

《設(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군영의 백(백성)을 하나로 않아서 싫어 나를 재(나아갈 때)에 능히 흩어짐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백성의) 기가 부드러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능히 갓난아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섬돌을 씻어내어 검은 곳(백성의 아픈 곳)이 보이도록 하여서 능히 흠(아픔)이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능히 지식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늘 문이 열려지고 닫혀지기(성인의 도가 펼쳐지기)를 능히 배우자 없이 (홀로) 할 수 있겠는가? 백을 밝혀 온누리에 미치도록 능히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출판번역임)
(※전문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어느 것을 어떻게 수정하였는지 보일 것이다.)

이 문장이 2천여 년 동안 헤매인 문장이다. 나야 魄(백)이 나오고 하여 그렇다 치지만 석학들이라는 분들은 좀 더 심도있게 정리를 했어야 했다. 앞에서 말했듯 노자가 바라보는 지도자상을 6가지의 예문을 들어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들고 지금의 세상지도자들에게 아니 노자 사후 지금까지의 지도자들 중에 6가지를 충족하는 지도자가 과연 있을까? 내가 미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리더들의 자서전을 단 한권도 읽어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넋두리 좀 했다. 이 문장은 ‘이’가 100%바르다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이 정확하고, 자세하고 상세히 설명하여 놓았고 나는 철학적 논지가 없어 그녀의 해석을 빌어와 나름대로 설명한다는 것을 밝힌다. 특히 여기의 백(魄)에 대한 설명은 가히 전문가의 수준이라고도 보여진다. 내가 볼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이것에 대한 기존의 역해를 보자.
재(載)는 거처한다는 것이다. 영백(魄)이란 사람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요 일(一)은 사람의 참이다. 사람이 늘 거하는 집에 처하나, 하나를 안고 정신을 맑게 하여 항상 여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만물이 저절로 손님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말이다.(왕필의 노자, 임채우 옮김, 예문서원)
육체를 싣고 道(하나)를 안고서 능히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박일봉님, P34)

보는 바와 같이 첫 문장을 헤매임으로서 이후 완전히 옆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읽은 도덕경 중에서 그래도 가장 번역이 나의 번역과 비슷해 보이는 문장을 올려놓은 것이다. 기존의 글은 접고 ‘이’의 해석을 보자.

우선 영(營)이라는 글자를 먼저 보자. 영은 노자당시의 춘추전국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는 군영(榮) 단위였다…노자는 이 글자를 ‘한 무리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위로 골랐다.

그것도…동질성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집합이다. … 때문에 여기서 노자가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된 사람들을 일컬어 한 말이다.…그래서 이 구절에서의 영(營)은 군대가 모인 진영처럼 운명 공동체로서 조직된 인간의 집단이나 조직을 말한다.

바로 국가이고 국민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자까지 붙여서 읽어보자. 영백(魄)은 국민의 넋 또는 국민의 마음이다. 이것을 우리는 민심(民心)이라고 한다. 영백(魄)은 민심(民心)이다(노자를 웃긴 남자,P252)

보는 바와 같이 여기의 백(魄)은 일정집단의 백성(지금의 국민)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기존 해석가들이 백(魄)을 백성으로 이해하였다면 이러한 오역이 나올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위에서 인용한 글 다음부터는 재(載)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제 맨 앞의 글자, 재(載)를 붙여 보자. ‘실을 재’ ‘가득 찰 재’를 붙이면 載營魄(재영백)이 된다. 즉, ‘營內(영내)에 가득 찬 魄(백)’이 된다.…載營魄包一(재영백포일)의 뜻은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에 담는다’이다.(동 책, P253)

뜻을 이해했으리라 본다. ‘이’의 해설에서 오류를 집자면 ‘영백’을 ‘국민의 넋’이라고 번역을 하고서 다음 번역의 순서로 ‘재’를 선택하려다 보니 ‘가득 찰 재’를 선택하였고 선택한 순서로 번역하여 보면 ‘재3영1백2,국민의 넋이 가득 차다’가 되어 ‘포일’과 이어지지가 않아 위에서 인용한 글처럼 ‘재영백’을 ‘영내에 가득 찬 백’이라고 번역하여 버렸다.

‘영백’이 먼저 ‘재’가 나중의 번역 순서여야 하는데도 스스로 1영, 2재, 3백의 순서로 바꾼 것이다. 결론은 한문법상 여기서는 재(載)를 가장 마지막에 번역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려면 재(載)의 훈으로 ‘가득 찰 재’보다는 ‘실을 재’가 더 맞다. 번역하면 ‘백성의 마음(민심)을 하나로 안아 싣고 갈 재에’가 되겠다. 이렇게 번역하여도 뒤의 ‘능무리호’와 하등의 저촉되는 곳이 없다. 뭐 뜻이야 大同小異하다.

다음은 ‘전기치유’다. 이 문장에서 노자관은 기(氣)는 사람이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보인다. 사람이 부릴 수 있는 것이기에 욕망(부정적임 면)도 자애로움(긍정적인 면)도 다 氣와 연관되어져 있다.

이 문장은 욕망에 가득 찬 백성의 마음을 갓난아이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를 물어본 것이라고 보인다. 갓난아이처럼 만드는 것이 다스림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갓난아이의 부드러운 기, 그렇지만 완벽한 기, 존재외에 무지 무욕 상태의 기를 만들어 낼 수 있냐고 노자는 묻고 있다.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지호)

이 문장에서 애민치국은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한데도 기존 해석가들은 넘 소홀히 하였다. ‘이’의 말을 빌리면 기존해석은 도리어 애민치국이 잘 못 들어온 문장이 아닌가하였다는데, 이쯤대면 … 쩝….
앞글을 이어 받아 노자는 계속하여 지도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섬돌 제'는 지금의 아파트 문화사람들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시골집에 보면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루를 오르기 위해 마루 앞에 놓아둔 신발을 올려놓는 돌이 섬돌이다.

그 돌을 깨끗이 씻어 준다는 의미는 이 문장에서 유추하면 집안의 구석구석을 닦아낸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하여 어두운 곳이 보여지게 되어 아픈 곳을 없애 줄 수 만 있다면 그게 최고의 다스림이 아닐까?

이 문장의 ‘척제현람’은 역시 번역이 틀린 곳이다. ‘이’의 번역에는 두 개의 목적어가 있다. 즉, (섬돌)을 씻다와 (어두운 곳)을 살피다이다. 뜻으로 보면 어울리나 이 경우 滌除玄覽이 ‘동사+목적어+목적어+동사’로 번역되어 ‘현람’의 문법이 틀리다. 그래서 이 문장의 번역은 '섬돌을 닦아 어두운 곳이 보이도록 하여'가 되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는 것(앎)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는 것은 편향성을 가져온다. 편향성을 갖고있는 자는 모든 것을 자기의 입맛에 맞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한다. 그런 그가 나라를 재대로 다스릴 수 있을까? 맨 날 당파싸움만 일어나지. 지도자의 모습에 맞추려는 간신과 촉새만이 넘쳐날 뿐이다. 아는 것으로 말고 텅 빈 도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게 (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있다. 하늘의 문이 천지의 근이고 그곳이 만물이 태어난 곳이니 곧 道다. 역으로 올라가면 도가 널리 이루어지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너는) 도를 널리 배풀 수 있느냐’정도가 되겠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함 다시 보자. 能無雌乎(능무자호)! 그냥도 아니고 배우자 없이 하라는 것이다. 배필 없이….

출가한 놈도 아닌,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도 아닌 ‘萬人之上’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모든 여자를 취할 수 있었던 당시의 신분으로, 도리어 다 버리고 솔로로 살아가라면 할 수 있는 넘이 몇이나 될까? 왕하고 싶어 뒤지고 싶은 놈한테 가서, ‘그래 너 왕 해라. 대신 여자(배필) 없이 해야한다’고 했다면 고자가 아니고서 승낙할 넘이 몇이나 있을까? 노자가 왕을 하려는 자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이 정도이니 맞아떨어질 만한 놈이 있을까? 간디라면 몰라도….

‘白을 밝혀 사방에 다다르게 한다.’ ‘능히 꾸밈이 없이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이 장의 6가지 질문 중에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이다.

온 천하에 도가 미치도록 한다. 여자 없이 도를 얻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미치도록 할 수 있느냐의 물음이다. 오직 당신의 소박함으로…. 문구상으로 보아 백(白)은 도(道)라고 이해되어진다.

전체적으로 점진적인 상승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의 글에는 마치 당시의 주나라의 왕과 노자가 대면하면서 대화하는 식으로 글을 풀고 있다. 문장만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저절로 든다. 내가 ‘이’를 책사로 생각했던 것은 문장에서 우러나는 넓은 상식에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노자 도덕경의 진실을 좇으려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한데 그 느낌은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끝나 버렸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생지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이와 같이) 그들을 살게 하며 그들을 기름에, 살아갈 뿐 있지 않고, 베풀 뿐 (그 베풂에) 의지하지 않으며, 우두머리일 뿐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현덕(玄德)이라 이르니라.

제10장의 결구다. 왕에게 물어본 6가지의 요구사항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왜 내가 너에게 그렇게 요구했는지 알아? 그러한 다스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히 이곳의 생이불유, 위이불시는 제2장에서 한번 나온 문구며 제51장에서도 나온다.

이 문장에 있어서 기존의 글을 올리면 ‘어떻게 저렇게 번역이 될 수 있지?’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버리고 여기의 ‘생지축지’만 비교해 보자. ‘생지축지’는 문장이 단순하여 도리어 번역에 애로가 있다. 기존 분들도 각양각색이며 ‘이’나 나도 달리 했다.

짐승들이 그러하듯이(노자를 웃긴 남자,P302) 낳고 기르면서도(완역본,P154)
이를 낳게 하고 기르되(노태준,P52) 만물을 낳고 기르면서도(박일봉,P34)

노자는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못된 짐승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그 자체이다.…인간도 어쩌면 인지가 덜 발달했던 옛날에는 다른 짐승처럼 배고프면 먹고 때가 되면 짝짓기하고 날이 저물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던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이 전체를 보면 생지축지란 말을 ‘짐승들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노자를 웃긴 남자,P299~302)

‘생지축지生之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는 제2장에 나왔던 말의 똑같은 반복이다.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 생이불유生而不有’에서 ‘만물작萬物作’이 ‘생지축지生之畜之’로 바뀐 것뿐이다. ‘만물을 만든다 해도가 만물을 낳고 기른다 해도로 바뀌었다.(완역본,P154)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하나만 지적하자. ‘이’의 해설의 인간관은 전적으로 노자성인의 관점이 아니다. 만물이 존엄하며 고귀하다고 보는 것이 흔들림 없는 성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출판물에서 ‘생지축지’의 두 之를 모두 의미 없는 삽입글자로 생각하여 ‘生畜’이라고 보고 ‘가축들이 살듯이’라고 되어져 ‘짐승들이 그러하듯이’로 풀었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의 능력으로 풀었다. 하지만, 이번은 之(지)를 ‘백성’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 봤다.

이 문장은 번역은 설왕설래할 소지가 있음으로 뜻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하자. ‘이’가 ‘처음에 역해한 뜻(가축)으로의 풀이가 그렇게 틀린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가축과 같은 삶을 들어다 보면 ‘배고프면 밥 달라’하고 ‘배부르면 놀든지 잔다.’ ‘치장할 줄 모른다.’ ‘무엇을 만들어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피곤하면 잔다’ 뭐 그 정도다. 그럼 그 같은 가축의 삶이 노자의 어떤 말과 연관될까? 바로 제3장에서 말한 ‘무지무욕’의 삶을 이야기한다고 보인다.

백성을 늘 ‘무지무욕’하게 하라는 것이 바로 ‘가축과 같은 삶을 말한다’면 내가 너무 비약일까?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순수함’이다. 즉, 간난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래서 뜻으로는 틀려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은 다스리는 자의 玄德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문장의 차례로 보아 ‘생지축지’부터는 앞의 6가지 질문에 대한 요약부분으로 ‘생지축지’를 이와 같이 푼 것이다. 즉, 문장을 전체적으로 연결하여 보면 ‘왕이여 당신은 내가 말하는 6가지의 경우를 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할 수 있냐는 것은 바로 당신이 (백성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온전히 길러내기를) 없는 듯이 살고 … 한다는 것이다’가 된다. ‘생지축지’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는 문장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나의 뜻이 맞다면 노자성인은 다스림을 畜(기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그래서 가축의 삶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育(육)과 어떠한 차이를 갖는 지는 독자님의 몫이다.

기존의 번역이나 해석은 ‘생지축지’를 ‘낳고 기르다’라는 식으로 역해하고 있는데 이 장(제10장)은 형이상학인 어머니(도)가 들어설 곳이 없다. 그래서 ‘生’을 ‘낳다’로 번역해서도 안된다.

※ 이 장의 원문은 앞 문장과 뒤 문장{能(능)~乎(호)}이 대각선으로 바뀐 곳도 있으나 내용상 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정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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