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사저널 패잔병들은 저항을 계속하기로 했다

“항복인가, 투쟁인가”

삶은 치욕이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죽어서 사는 것은 허구이며, 사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모티브이자 주제다. <남한산성>의 저자는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김훈이다.

1년간의 투쟁을 끝내고, 시사저널 기자들이 사퇴했다. 패배를 시인했다. 승리가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그들은 정말 고군분투했다. 편집권 독립이라는 기본적인 명분이자 가치를 지키려고 사주는 물론 거대 삼성과의 싸움을 벌인 것이다. 만약 김훈이 편집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사는 것이 이기는 것이므로 투쟁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을까?

시사 저널 패잔병들은 다시 저항을 계속하기로 했다. 독립기자단을 만들고 새로운 매체 창간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을 계기로 인조의 항복이 매우 타당한 결정이었다는 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느낌이다.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라는 것으로도 비친다. 만약 투쟁했다면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시사저널 기자들은 항복이 아니라 투쟁을 선언했고, 질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결코 진 싸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틀 사이에 익명의 기부액이 1억원을 넘겼다는 소식도 들렸기 때문이다.

만약 인조가 계속 항전을 했다면, 다른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았을까? 비록 인조가 패퇴하였다 해도 또 다른 방식의 저항이 그 주체적 정신을 갖지 않았을까? 그러나 정작 인조에게 부족했던 것은 군사력과 물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과 가치였다.

편집권 독립처럼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허무했다. 항복인가 투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만 함몰되었다. ‘남한산성’ 현상은 우리 사회가 가치와 명분이 실종되고 있는 점을 방증한다. 자본의 일방성과 세계화 시대의 증후군 말이다.

삼성과 맞선 이들에 대한 반응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이 강하게 작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차라리 정치권력과 붙은 싸움이라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청와대 권력과 붙은 기자실 존폐 논란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미 정치권력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투쟁인가 항복인가의 대상도 아니다. 시사저널 사태에서 나타난 초기 무관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시사저널 퇴직 기자단에 답지 하고 있는 지지와 성원을 볼 때 우리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있다면, 인조가 계속 싸웠다면 역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시사저널 투쟁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삶을 위해 치욕을 감내하는 것과 명분과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본질 중 하나다. 고민은 투쟁인가 항복인가가 아니라 여전히 왜 사는가이다.

현재의 희생은 미래의 삶이 겪을 치욕을 벗겨줄 수 있다. 시사저널 기자들의 투쟁은 죽어서 살았다. 지금 김훈이 시사저널 편집장이라면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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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문화평론가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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